



은혜갚은 두꺼비 外
지금의 성남시 분당동 건너편에는 야트막한 산이 있는데, 이 산의 이름이 두꺼비능산이다. 이곳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이 마을에 아주 마음씨가 착한 처녀가 살고 있었다.
집안의 자식이라곤 이 처녀가 전부였기에 집안 일은 물론, 농사일까지 부모를 도와가며 열심히 살아가는 아주 성실한 처녀였다.
그런데, 어느날 저녁밥을 짓기 위해 부엌으로 나갔는데 어디선가 두꺼비 한 마리가 들어와서 밥짓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녀가 저녁밥을 다 짓고 밥상을 차릴 때까지 두꺼비는 계속 앉아있었다. 이 모습을 본 처녀는 남은 밥 한 주먹을 두꺼비에게 주며 “네가 배가 고픈 모양이구나, 자 이 밥 좀 먹어보렴” 하면서 두꺼비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었다.
‘그동안 많은 집을 돌아 다녀 보았지만 이렇게 마음씨가 고운 처녀는 처음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두꺼비는 그 처녀의 집을 찾아 다녔고, 그때마다 처녀는 한번도 거르지 않고 밥을 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결혼할 나이가 다 되어 처녀는 드디어 이웃 마을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동안 처녀가 베풀어 준 따뜻한 정성을 잊지 못한 두꺼비는 자신도 처녀가 시집가는 곳을 따라 갔다. 처녀가 시집을 간 집은 너무 가난하여 여기 저기에 썩은 나무가 많았고, 지붕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낡은 집이었다.
이런 모습을 본 두꺼비는 이제야 자기도 그 처녀를 위해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지붕에서 떨어지는 온갖 벌레들을 잡아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밤마다 두꺼비는 처녀가 자는 방을 지키며 떨어지는 벌레를 잡아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두꺼비는 아주 이상한 빛이 천장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가만히 있으면 누군가가 그 빛에 의해 잡아먹힐 것만 같은 무서운 빛이었다. 두꺼비는 분명히 새 아씨를 잡아먹을 괴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괴물에게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붉은 빛을 강하게 뿜어내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빛을 뿜어내던 괴물도 두꺼비의 강한 빛에 못 이겨 그만 떨어져 죽고 말았다. 알고 보니 그 이상한 괴물은 천년을 이 집에서 묶은 지네였다. 결국, 두꺼비의 힘으로 지네는 죽게 되었고 처녀는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두꺼비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기도 전에 너무나 많은 힘을 내뿜은 두꺼비는 그만 죽고 말았다. 자기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처녀에 대한 은혜를 죽음으로 갚은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온 동네에 퍼져 마을 사람들은 두꺼비의 시신을 앞산에 묻어 주고 제사를 지내 주었으며, 그때부터 이 산의 이름이 <두껍능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효자정의 금잉어
효자정은 남한산성의 북문안에 있는 조그마한 우물인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지고 있다.
오랜 옛날에 그 산성 북문안 마을에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정남”이라는 한 소년이 있었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정남은 자신의 능력으로 끼니를 이어가는 한편 극진히 아버지의 병환을 간호하였으나, 약 한 첩 제대로 쓸 수 없는 가난한 살림이다 보니 아버지의 병은 좀처럼 낫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 마을을 지나가던 한 나그네가 커다란 잉어 한 마리만 구해 고아 드리면 아버지의 병은 깨끗이 완쾌될 것이라고 하였다. 정남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잉어를 구하러 나섰다.
그러나 때는 마침 겨울이라 강물이 얼어 잉어를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많은 강을 모조리 헤매고 시장을 찾아봐도 끝내 잉어를 구할 수가 없었다.
정남은 잉어를 구할 길이 없어 마침내 절망과 실의에 지친 몸을 이끌고 마을로 돌아오던 도중 호젓한 산기슭의 바위 밑에서 아직도 얼지 않은 조그마한 우물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정남은 굶주림에 지친 배를 우물물로 우선 허기를 채우고 아버지에게 드릴 잉어를 구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빌고 빌었다.
오랫동안 우물을 바라보고 소원을 빌다 무심코 우물을 들여다본 순간 정남은 깜짝 놀랐다. 우물 속에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금빛 비늘을 번쩍이며 놀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복하여 우물에 잉어를 보내준 것이었다.
정남은 기쁨에 넘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잉어를 잡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밤새도록 정성껏 고은 잉어국을 아버지께 드렸다. 잉어국을 먹은 아버지는 과연 나그네의 말대로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
이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정남을 ‘하늘이 낳은 효자’ 라고 칭찬하고 다같이 잉어를 내려준 하느님께 감사했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 그 우물을 ‘효자 우물’이라고 부르며 지금도 남한산성을 찾는 사람들이 우물에 잠깐 멈추어 전설이 담긴 효자 우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기도 한다.
이경류 선생의 무덤 앞을 지나가던 왜군이야기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조선땅 천지를 노략질하면서 다닐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날 왜군들이 수내동 마을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당시 수내동 마을 한 구석에는 왜군과 싸우다가 돌아가신 이경류 선생의 무덤이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선생의 애국정신을 생각하며 말을 타고 이 무덤을 지날때면 꼭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왜군들은 이런 예의도 모르고 그냥 선생의 무덤 앞을 지나치려 하였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말의 발이 땅에 붙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채찍질하고 말을 끌어 봐도 말발굽은 땅에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이에 화가난 왜군들은 마침내 자신이 타고 온 말의 목을 그 자리에서 베어 죽게하였다.
그런데 전쟁 중에 아무리 좋은 무기가 있어도 말이 없으면 그 군대는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는데, 자신들의 말을 모두 죽였으니 일본 군사의 힘은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일본군은 패망하고 임진왜란은 우리 조선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마을 사람들은 이처럼 전쟁에 이길 수 있었던 원인이 바로 이러한 사건 때문이 라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도 중앙공원 안에는 이경류 선생의 묘가 있고 그 앞으로는 큰길과 광장이 있다.
청계당(淸溪堂)과 벽암대사(碧岩大師)
청계당은 벽암대사 김각성(金覺性)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남한산성내에 건립되었던 사당(祠堂)이었으나 오랜 세월동안 풍마우세(風摩雨洗)되어 지금은 그 자취도 알 길 없고 전설만 남아있다.
벽암은 선조(宣祖)7년(1574년)에 출생하여 현종(顯宗)1년(1660년) 타계한 조선시대의 명승(名僧)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때는 스승과 더불어 승병(僧兵)으로 해전에 참전하였고, 그 뒤 광해군(光海君)의 부름을 받아 봉은사(奉恩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판선교도총섭(判禪敎徒摠攝)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스승이 타계한 뒤에는 그 자리를 물려받아 지리산(智異山)에 법당을 세우고 불교도의 종사(宗師)가 되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또 다시 의승병(義僧兵) 3천명을 모집하여 항마군(降魔軍)이라 칭하고 분전하였다. 호란(胡亂)이 끝난 뒤에는 지리산에서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각설하고 남한산성에 그의 사당이 세워진데에는 다음과 같은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벽암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불가에 귀의하지 않으면 단명할 운명이라 하여 14세에 금강산(金剛山)에 입산, 명승(名僧)의 문하에서 불도와 무술을 연마하였다. 그리고 광해군(光海君)때 무과(武科)에 응시하였는데 과거장에서 그는 당시 조선의 실정을 염탐하기 위하여 잠입해 있던 청(淸)나라의 장수 용골대(龍骨大)와 최종까지 겨루어 장원급제하고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제수 받았다.
그러나 점점 비뚤어지는 광해군의 폭정에 실망하여 벼슬을 내놓고 다시 금강산에 입산하였다. 그리하여 수도생활을 하던 중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고 어느 날 꿈속에서 벽암은 부처님의 원몽(願夢)을 보게 되었는데, 이 땅에 머지않아 피비린내나는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나라와 사직을 구하도록 성벽을 쌓으라는 것이었다. 그 싸움이란 곧 병자호란에 대한 예언이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벽암은 그 길로 산을 내려와 인조(仁祖)를 배알하고 머지않아 북쪽에서 오랑캐의 무리가 우리 나라에 쳐내려올테니 팔도의 성곽을 튼튼히 해야할 것을 고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인조의 하명으로 남한산성 축조현장에 와서 전국의 승군을 이끌고 3년만에 성을 쌓아 완성시켰다. 이에 조정에서는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직함과 의발을 하사하여 그 공을 치하하였다.
마침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벽암은 의승(義僧)을 모집하여 분연히 일어섰다. 그런데 부평(浮評)벌에서 적병과 크게 싸움이 벌어졌을 때의 일이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전황이 불리하게 되자 벽암은 단신으로 적진에 나아가 양군의 대장(臺狀)끼리 승부를 겨루자고 외쳤다. 이때 군졸 한 명을 데리고 나타나 적장은 다름 아닌 용골대였다. 두 사람은 용골대의 제안으로 다음날 싸우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이튿날이 되어 보니 적장 용골대(龍骨大)는 지난날 벽암이 과거장에서 자신의 목숨을 빼앗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그 보답으로 오늘은 이만 물러간다는 편지를 남기고 떠나가 버리고 약속한 싸움터에는 없었다. 그 후에도 벽암은 도처에서 적병을 물리쳤으나, 전세가 날로 불리해져 인조(仁祖)임금이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되자 그 길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러한 대사(大師)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후세 사람들이 청계당(淸溪堂)을 지었다는 것이다.
천마(天馬)와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병자호란(仁祖 14년)때 청태종(淸太宗)의 침략군에게 쫓긴 인조 인금이 남한산성에 피신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날이 갈수록 전세가 점점 불리해져 왕은 영의정 김류를 비롯한 척화파(斥和派)와 최명길(崔鳴吉)등의 주화파(主和派)가 서로 언쟁을 벌이자 급기야 일부 장졸들만 남기고 강화(江華)로 파천(播遷)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인조는 국론(國論)이 통일되지 못하고 척화파와 주화파가 서로의 이견만 고집하고 언쟁만 일삼는데 매우 불쾌하게 여겼던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말 못하는 어승마를 다루기가 어려워지고 모두들 기이한 생각에만 정신을 돌리고 어승마를 움직일 방안은 찾지 못했다. 아무리 군졸이 고삐를 나꾸어채고 재촉해 보아도 말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소리만 지를 뿐 한 발자국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물론 여러 군졸이 번갈아 가면서 말을 움직여 보았으나 막무가내로 요지부동이라 야단법석이었는데 이 위급한 순간에 한양(漢陽)에서는 또 급보가 전해졌다. 오랑캐들이 남한산성을 향해 물밀듯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진퇴유곡(進退維谷)의 다급한 순간을 맞이하자 신하들은 한층 더 말을 재촉하였으나 말은 꼼짝하지 않는 터이라 기이한 생각에 착잡하였다.
그러나 이때 인조는 “말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수상하고, 짐(朕)을 남한산성에 머물게 하려는 징조이니 그리 알고 신하들은 나의 명에 따르도록 하라"고 하명하였다. 그러나 한참 후에 말은 신기하게도 스스로 말머리를 돌려 단숨에 옥좌(玉座)가 있는 정각까지 달려가더니 몸을 낮추어 임금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신하들은 더욱 기이하게 여겼고 결국 강화도의 파천은 중지되고 말았다. 그런데 뒷날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때 청태종은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할 것을 미리 짐작하고 무술이 뛰어난 장수와 군사들을 길목 요소에 매복시켜 조선왕을 사로잡으려 했었다는 것이다.
비록 45일만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으나, 그래도 말 때문에 파천도중에 사로잡히는 더 큰 치욕을 면했다는 것은 실로 불행 중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당시 인조가 탔던 어승마를 천마(天馬)라고 불렀다. 지금도 이 전설은 구전되어 오고 있다.
태종우(太宗雨)의 내력
태종(太宗) 18년의 일이다. 농사를 생업의 제일로 생각하던 당시, 유례없는 오랜 가뭄이 계속되어 백성들은 하늘을 우러러 비가 내리기를 빌었지만 온 천지를 태울듯한 뙤약볕만 계속될 뿐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이에 별의별 유언비어가 나돌아 민심을 소란케 하더니 날로 더욱 흉흉해져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들고 있었다.
굶주림에 허덕이던 백성들은 하늘을 원망했고 거칠어진 그들의 동요가 구중궁궐에까지 미치기 시작하여 마침내 태종의 귀에도 들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태종도 각 고을 관찰사들을 불러 민심을 수습하지 못하는 것을 꾸짖었으나 오랜 가뭄으로 곡식이 없고 설상가상으로 괴질까지 번지고 있다는 말을 들은 그는 재생원에 명하는 한편 밤마다 하늘을 우러러 비를 갈구하였으나 끝내 비는 내리지 않았다.
이에 태종은 “짐이 부덕하여 하늘이 내 소원을 물리치심이니라" 한탄하며 침식을 멀리하다가 마침내 자리에 눕고 말았다. 기우제를 친히 주재하던 왕이 이에 이르자 온 조정이 술렁대기 시작했으나 비는 내리지 않고 괴질은 더욱 만연해서 거리거리에서 곡성이 그치지 않았다.
이 같은 기막힌 천재지변에 노심초사하여 생사지경을 헤메던 태종은 어느 날 비몽사몽간에 자기를 꾸짖는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 “내일 날이 밝는 즉시 궁전 뒤뜰에 장작을 높이 쌓도록 하여라. 과인이 부덕하여 하늘의 노여움을 샀거늘 내 스스로 제단의 제물이 되어 백성을 구할 것이니라." 하는지라 이 말에 중전 및 중신들은 아연실색했으나 지엄한 왕명을 거역할 수가 없어 태종이 올라앉은 장작더미에 영의정이 통곡하며 불을 지폈다. 바싹 마른 나무는 삽시간에 타올랐고 신하와 궁녀는 물론, 이 소식을 들은 온 백성들도 합장하며 왕의 과감한 제민정신에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불길이 점점 높아져 왕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맑던 하늘이 갑자기 먹구름으로 뒤덮히고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무서우리 만큼 억센 폭우가 쏟아졌다. 사납던 불길을 꺼지고 태종이 무사해 지자 백성들은 어진 왕을 찬양하기에 바빴다. 그 후부터 5월 초열흘에 오는 비를 “태종우"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 전설로 인해서 가뭄이 심할때면 많은 사람이 모여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낙송정(落訟井)의 두 얼굴
낙송정은 남한산성의 서장대(西將臺) 아래쪽에 있는 우물이다.
이 우물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남한산성 일대의 주민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 광주군 서부면(西部面)에 도부자라는 사람이 아들 형제를 데리고 살았는데, 두 아들은 성격이 아주 대조적이어서 큰아들은 몹시 공부하기를 싫어했으며 심술이 많았고, 둘째 아들은 몸이 허약했으나 마음씨가 착하고 글읽기를 좋아하여 도부자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도부자는 사랑하는 둘째 아들의 과거를 며칠 앞둔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자 평소에 아우를 미워하고 시기해오던 형은 그 때부터 동생을 구박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 이유없이 매질을 하고, 끼니를 굶기며, 날마다 해가 저물도록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오게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동생은 밤이면 몰래 공부를 하였고, 조금도 형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은 마침내 동생을 죽일 궁리까지 하였다. 주막의 주모에게 건달꾼 한 사람을 구한 다음 그 사나이를 많은 돈으로 매수하였다. 즉 그의 음모는 동생이 산에 나무하러 가면 그 때 사나이가 미행하여 죽이게 하였던 것이다.
같은 핏줄을 나눈 형의 이런 무서운 음모를 알 턱이 없는 동생은 평소와 같이 나무를 하러 산으로 올라갔다. 드디어 깊은 산 속에서 그는 사나이에게 붙잡혔다. 위기의 순간! 그러나 그 순간 사나이의 마음이 달라졌다. 사나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착한 동생을 죽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모든 자초지종을 동생에게 얘기하고, 얼마간의 돈을 주어서 자기가 죽인 것처럼 동생을 멀리 떠나게 하였다. 동생은 사나이에게 감사하며 눈물로 정든 고향을 떠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동생은 타향에서 갖은 고생 끝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꿈에도 못 잊어하던 고향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그 옛날의 착하기만 하던 동생이 아니었다. 복수의 칼을 들고 자기를 죽이려 했던 형을 붙잡아서 치죄하려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그는 먼저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성묘하고, 형의 소식을 염탐해 보았다. 그동안 형은 그 많던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탕진하고 지금은 알거지가 되어 투전판으로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들어왔다. 더욱 괘씸하게 생각한 그는 그 길로 광주부윤(廣州府尹)을 찾아가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형을 잡기 위해 고향집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가는 도중에 우연히 어느 맑은 샘물을 발견하고 잠시 목을 축이게 되었다. 그런데 물을 마시기 위해 샘물에 엎드리려는 순간 그는 물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주춤하였다. 그 얼굴은 10년전 자기를 죽이려했던 형의 모습과 너무나 같았던 것이다.
비로소 그는 복수귀(復讐鬼)가 되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일인가를 깨달았다. 자기는 형보다 더 나쁜 인간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돌아섰다. 형을 용서키로 한 것이다. 그런 일이 세사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그 샘물 낙송정(落訟井)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송사(訟事)하는 자가 이 물을 마시면 재판에 지고 만다는 뜻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진터벌(陳攄坪)의 전설
진터벌은 남한산성에서 내려다보이는 광나루쪽 들판을 말하는데, 이곳에서는 병자호란(丙子胡亂)때, 한 부인의 참혹한 일화가 서려있다.
때는 인조(仁祖)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은 그 해 겨울 강화(江華)쪽으로 피난길을 떠나가려다가 오랑캐들이 이미 그 길을 막고 있다는 급보에 접하자 남한산성으로 파천(播遷)하였다. 왕이 떠나버린 장안은 더욱 크게 술렁이고 저마다 피난을 떠나느라 아우성들이었다.
조정 벼슬아치들의 권속들도 남한산성으로 피난길을 재촉하였다. 대부분이 부녀자들과 아이들로 이루어진 일행이었는데 그 중에는 김승지 부인과 이참판 부인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일행은 광나루를 건너자마자 오랑캐의 장수인 용골대(龍骨大)가 거느린 적병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가장 두려움에 놀란 것은 부녀자들이었다. 드디어 적병들은 젊은 부녀자들만 별도로 가려내고 밤이 되자 저마다 한 명씩 강제로 끌고 사라졌다. 이참판부인은 용골대에게 끌려가고 김승지 부인도 한 장수에게 끌려갔다. 그러나 김승지 부인은 이미 모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날 밤 부인은 은장도로 적 장수의 가슴을 찔러 죽이고 그 장수가 숨을 거두면서 마지막 휘두른 칼에 맞아 자신도 죽음을 당했다. 이튿날 이 사실을 안 적장 용골대는 대노하여 김승지 부인의 시체를 토막내어 한강에 버리게 하였다. 이와 반대로 용골대에게 끌려갔던 이참판 부인은 그녀는 용골대의 품안에서 자진하여 추파를 던졌고, 전쟁이 끝나자 그의 첩이 되어 청(淸)나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일찍이 그녀는 정승부인들만이 모인 자리에서 만약, 청나라 병사에게 끌려가 겁탈을 당한다면 자기는 욕을 당하기 전에 자결하고 말겠다고 큰소리 쳤었다. 이와 반대로 김승지 부인은 그 때를 당해 봐야 알겠노라고 하여 좌중의 지탄을 받았었는데 결과는 이렇듯 반대로 되고 만 것이다. 이래서 세상만사는 실로 말보다 그 실천이 어렵고 중요한 것이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나라 병사들도 물러가고 평온한 세상이 되자, 김승지 부인의 갸륵한 죽음을 슬퍼하여 두고두고 이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 것이다.
금단선사와 소년
남한산성 동문 북쪽에 있는 장경사(長慶寺)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옛날에는 남한산성 안에 조그만 암자를 짓고 금단대사라는 스님 한 분이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금단대사는 우연히 한 소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소년의 착한 마음씨에 감동되어 매일 같이 바둑을 두며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소년의 어머니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소년에게 대추와 곶감을 달여서 먹이면 병이 낫는다고 알려주었다. 한여름인데도 소년은 대추와 곶감을 구하겠다고 집을 나섰다.
금단대사는 어린 소년을 그냥 보낼 수가 없어 자신이 대추와 곶감을 나서기로 하였다. 그는 소년에게 어머니를 잘 간호하라고 당부한 후 일주일 뒤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축지법(縮地法)을 써서 묘향산(妙香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사이 소년의 어머니는 기어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금단대사가 꼭 일주일만에 곶감과 대추를 구하여 돌아왔을 때는 소년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금단대사는 날마다 고개 위에 올라 소년을 기다렸으나 소년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금단대사는 돌아오지 않는 소년을 못 잊는 한편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고개 위의 바위 옆에 절을 지었는데, 그 절이 바로 지금의 장경사(長慶寺)라는 것이다.
복(福)우물과 금베틀
성남시 진입로인 복정로 중간지점에서 좌측을 바라보면 상수도 정수장이 있는데, 그 뒤편 밭에서는 요즘도 기와조각과 도자기조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영장산(靈長山) 중턱에는 자손이 절손되어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채 방치된 지난날 고관들의 묘비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여기 저기에서 눈에 띄고 있다. 그 중에는 연일 정씨(延日 鄭氏)라고 밝혀진 묘가 있는데 역시 절손되고 외손봉사(外孫奉祀)를 받아온 사실과, 그의 사위가 윤경지(尹敬之, 병마절제도, 위홍현감, 원주진관역임)인데 경원대학교 건너편 양지마을에 묘비가 있고 비문에는「無子有一女外孫奉祀」라고 기록되어 대를 이을 아들은 없고 딸 하나만 두어 절손되었음을 암시해주고 있었다.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영월(寧越)로 귀향 보내고 왕위에 오르자 성삼문(成三問)등 사육신과 충신들이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김질(金秩)의 고자질로 탄로되자 연루된 자들이 모조리 잡혀가 죽음을 당하던 때이다. 당사자만 죽이는 것이 아니고 가족은 물론 외가, 처가까지 몰살시키는 살육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젊은 선비 정호(鄭灝)는 난을 피해 어린 자식들과 부인을 데리고 이곳 저곳을 숨어 다니다가 마침내 지금의 복정동(福井洞) 정수장 뒤 산비탈에 당도하였는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인가는 없고 깊은 산중이었다. 여러 날을 숨어 다니느라 허기지고 지친 몸이라 두 내외가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결에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平原大君, 세조의 동생이며 세종대왕의 일곱째 아들로 그 중 가장 총명하고 건강하여 세종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자랐는데 19세 때 병을 얻어 요절하자 지금의 수진초등학교 뒤편 양지쪽에 장사를 지냈었다.)의 혼령이 나타나 이르기를 “정호는 듣거라. 비록 나의 형(世宗)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여, 조카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다 쫓기는 놈이 되었으나 나라가 안정되면 사면(赦免)이 될 터이니 다른 곳으로 방황하지 말고 이곳이 명당자리이니 터를 잡고 처자들과 잘 살도록 하여라" 그리고 두 가지를 당부하였는데 “다만 두 가지를 알려주마, 첫째는 영장산 꼭대기에 시신의 뼈가 묻혀서는 아니 될 것이고, 두 번째, 지금 그 자리에 깊은 샘을 파도록 하라 그러면 10년의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복샘이 될 것이다. 그리고 대대손손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이 번창하고 훌륭한 명문이 되리라" 하였다. 꿈에 놀라 깬 정호는 당장 그 곳에다 움막을 짓고 밭을 일구며 우물을 깊이 파기 시작하자 구슬같은 샘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리고 일구어 놓은 밭은 논으로 변하고 가문은 점차 번창했으며, 늦게나마 사면(赦免)도 받게되자 과거에도 응시하게 되어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랐다. 정호의 부인 유씨는 길삼 솜씨가 뛰어나 집안에는 사시사철 베틀 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다. 아버지에 이어 아들 세경(世卿)이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 지방의 명문으로 가세가 대단하였다. 증손 경순(景錞)도 돈영부주부를 역임하였고 고손자인 정립도 급제하여 공조참판까지 지내는 역대명문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 집안에는 가보가 하나 전해 내려오고 있었는데, 정호의 아들인 세경이가 한평생을 길쌈으로 가문을 일으킨 어머니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서 금베틀 하나를 마련하여 어머님의 영전에 받쳤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정립이 선조의 명을 받아 일본(日本)의 도꾸가와이에야스의 습위식에 사절로 가게되었다.
이틈에 떠돌이 머슴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여종과 눈이 맞아 여종으로부터 이 집안의 비밀을 알아내게 되었다. 비밀인 즉, 영장산을 돌보는 이유는 죽은 사람의 뼈가 산 정상에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고, 또 하나 금베틀이 대대로 전해로는 내력이었다. 그 머슴은 이웃마을의 몰락한 세도가에게 돈 몇 푼 받고 영장산의 비밀을 팔아먹고 말았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146명의 동포를 데리고 돌아온 정립은 그 같은 사실을 알 리 없어 관직에만 충실했으며 딸 하나 낳고는 출생이 없고 가문도 기울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정립이 죽고 얼마 안되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는데, 오랑캐들이 이곳까지 들이닥쳐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仁祖)를 포위하고 살육을 일삼자 이 집 식구들도 피난을 가게되었는데, 정립의 부인은 금베틀만은 그대로 두고 떠날 수 없다하여 밤중에 복우물 속에 집어넣었다. 기회만 노리던 머슴은 이 광경을 놓칠 리가 없었다. 모두다 피난을 떠나자 머슴은 이 핑계 저 핑계로 집으로 돌아와서 금베틀을 건져내어 도망칠 작정으로 복우물에 내려가는 순간 난데없이 “꽝”하는 천둥과 함께 우물이 무너져 그는 죽고 말았다.
그 후 피난갔던 정립의 부인마저 돌아오지 않았고, 이 집안은 폐허로 변해버렸다. 이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 금베틀을 찾기 위해 금속탐지기까지 동원된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정(林巨正)과 다래덩굴
상대원동 공단 뒤편 보통골에는 5백여 년 된 상수리나무가 있어 예전에는 동네사람들이 해마다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는데 그 상수리나무 아래가 옛날 의적 임꺽정의 생활터전(소굴)이라는 전설이 지금까지 전하여지고 있다. 임꺽정(林巨正)은 조선 명종 때(1547~1567) 사람으로 양주땅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감히 당할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전국의 씨름판을 돌며 송아지란 송아지는 다 몰아오고 또한 활쏘기와 칼쓰기 대회 역시 일등은 임꺽정의 몫인데도 백정출신이라 벼슬은커녕 항상 천대만 받고 살았다.
그 당시 척신들이 권력을 잡고 뇌물을 받아먹고 벼슬자리를 주었으니 지방의 수령들은 뇌물로 준 돈의 본전을 챙기려고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기가 일쑤이고 만약에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잡아다 감옥살이를 시키는 부패한 세상이었다. 임꺽정도 아버지가 재산을 몽땅 빼앗기고 관에 붙들려가서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고 오는 것을 보고 울분을 삼키며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다. 비록 천민이라 벼슬은 못할지라도 불쌍하고 죄 없는 백성을 도와주기로 결심하고, 집을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의적단(義賊團)을 만들었다. 우선 뇌물을 거둬먹는 탐관오리들의 버릇을 바로 잡기로 하고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일대를 누비며 백성들로부터 빼앗아 쌓아놓은 양곡창고를 모두 털어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주었다. 그 같은 선행 때문에 백성들은 의적인 임꺽정이 오기를 기다리게 되고, 임꺽정과 같은 패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숨겨주고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관가에서는 임꺽정을 잡기 위하여 경기도 일원의 지방수령들을 모두 무관으로 교체하고 포도관을 파견하여 임꺽정 체포에 혈안이 되었으나 신출귀몰한 임꺽정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억근이라는 포도관이 임꺽정의 부하 여럿을 잡아죽였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임꺽정은 개성관아를 습격하여 이억근을 잡아죽이고 말았다. 그 후로는 임꺽정이 나타날까봐 떨고있는 지방수령이 많았고, 임꺽정이 나타나 창고를 몽땅 털어 백성에게 나누어줘도 보복을 받을까봐 두려워 신고도 못하였다. 이렇게 되다보니 자연적으로 가짜 임꺽정이 전국에 활개를 치고 다녔는데 어디로 가나 임꺽정이라고만 하면 관리들도 벌벌 떨고 금은보화를 바쳤다. 이 같은 세월이 수년동안 지나고 보니 나라에서는 대대적인 임꺽정 토벌이 시작되어 지금의 상대원 보통골의 다래덩굴 소굴을 떠나게 되어 황해도 땅 구월산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결국은 포도사인 남치근의 계략에 말려 임꺽정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 후 탐관오리들 때문에 임꺽정 같은 의적이 나타날 것을 우려한 조정에서는 관리채용에 신중을 기하였다고 전한다. (임꺽정 이야기는 ≪명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음)
구징(具徵)의 무덤
남한산성에서 내려다보이는 광주군 서부면(廣州郡 西部面)에 능내(陵內)이라는 곳이 있다. 지금은 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나 옛날 백제시대(百濟時代)에는 왕릉이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조선(朝鮮) 중종(中宗)시대의 공신인 구징의 큰 무덤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서려 있다고 한다.
연산군(燕山君)을 폐위시키고 중종이 왕위에 오른 직후의 일이다. 반정공신 구징(具徵)이 하루아침에 행방이 묘연해졌다. 왕명을 받은 영의정 성희안(成希顔)은 8도의 수령방백에게 구징을 찾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에 은거하고 있는 구징을 찾아내어 중종 앞에 데려왔다. 즉, 지난날의 대궐 안의 살림을 도맡아 하던 몸으로 연산군의 음행과 학정을 보다못하여 이 나라의 사직과 백성을 구하기 위해 반정에 참여하기는 하였지만 선대왕을 모시던 신하로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은 할 수가 없으니 통촉하여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이에 감동한 중종 임금은 더욱 조정에서 일해주기를 바랬으나 구징은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촌노들과 어울려 책을 읽으며 한가로이 세월을 보내던 중 을묘사화(乙卯士禍)가 일어났다. 여기에서 화를 입게된 이랑(吏郞) 구수복(具壽福)이 구징의 집으로 피신을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먼 친척벌이요 옛날 조정에서 남달리 친하게 지내던 사이라 구징은 구수복을 자기 집에 숨겨주었다. 나라에서 찾고 있는 죄인을 숨기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구수복은 죄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조정에서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중종은 조금도 구징의 죄를 문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가 나이 70이 넘어서 세상을 떠나자 생전의 공로를 표창하고 특별히 예장(禮葬)을 치루어 주었다는 것이다.
암구렁이와 총각
남한산성의 서문인 우익문(右翼門)을 나서서 서산능선에 오르면 큰 무덤이 하나 있는데, 이 이야기는 그 무덤에 얽힌 전설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5백년 전 한양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고있던 한 청년이 광주(廣州)에 있는 친척집에 식량을 얻으러 갔다. 그러나 미처 남한산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날은 저물고, 거기다가 소나기까지 퍼부어 청년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다. 그 때 멀리 어둠 속에서 깜박이는 불빛이 보였다. 청년은 뛸 듯이 반가워서 그 불빛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였다. 한편으로는 괴이하고 두려운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지금 그의 형편으로는 그 불빛이 구세주나 다를 바 없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불빛은 외딴 초가집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청년은 더욱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나 집안의 동정을 살펴본 후 주인을 불렀다. 그런데 방문을 열고 나온 주인은 묘령의 아리따운 처녀가 아닌가? 청년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하였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으나 이미 그는 처녀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 처녀가 산적의 딸이라도 좋고, 천년 묵은 구미호(九尾狐 : 꼬리가 아홉인 여우)라도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무엇에 홀린 듯 처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처녀가 차려 내온 진수성찬의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그 날 밤 처녀와 함께 뜨거운 정을 나누었다. 처녀는 자기가 산 속에서 혼자 살게된 것이나 청년이 길을 잃고 산 속을 헤매게된 것이 모두가 옥황상제(玉皇上帝)의 뜻이며 두 사람의 만남도 옥황상제가 점지해준 인연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튿날 날이 밝자 청년에게 급히 떠나기를 재촉했다. 청년은 하는 수 없이 처녀와 이별하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도저히 처녀를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도중에서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 처녀는 인간이 아니라 5백년이나 묵은 암구렁이라는 산신령의 목소리가 쩡쩡 울려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청년은 기어이 처녀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처녀의 초가집은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에는 커다란 고목이 서 있고 그 곁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처녀가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비로소 처녀는 자기의 정체를 밝히고 산신령의 말대로 자기는 5백년 묵은 암구렁이의 화신인데 이제는 청년의 힘을 입어 승천하게 되었다며 자기가 승천한 뒤 비늘 세 개가 떨어질 것이니 그 비늘이 떨어진 자리에 장차 청년의 묘를 쓰라고 하였다. 그러면 자손중에 유명한 장수가 태어날 것이라는 것이었다. 말을 마치자 처녀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고, 과연 비늘 세 개가 떨어졌는데 비늘이 떨어지자 매화나무로 변하였다. 그 후 청년은 장가를 들어 다복하게 살다가 죽었다. 그리고 죽을 때 처녀의 말대로 유언을 하였다. 가족들은 그의 유언대로 그 매화(梅花)나무 자리에 묘를 썼는데 정말 자손중에 유명한 장군이 나왔으니 그가 바로 임경업(林慶業) 장군이라는 것이다.
노장군과 물줄기
지금의 분당구청 뒤 통로골에서 율동의 새마을연수원으로 가다가 고갯길에 못미처 좌측편에는 자그마한 저수지가 있는데 이 저수지는 ‘붕어반 물반’이라는 믿지 못할 소문 때문에 혹시나 하고 강태공들이 밀려오고 있다. 옛날에 저수지의 위에는 노장군이라는 농부의 집이 있었는데 천석군이나 되는 부자로 살았으며, 욕심만 부리다가 알거지로 망해버린 전설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노장군이라는 농부는 어려서부터 집안이 가난했기에 글공부를 하지 못한 일자무식이었다. 하지만 심덕 하나는 모범이었고 거기에다 힘이 장사로 이름난 사람이라 그를 노장군이라 불렀다.
힘이 장사라는 덕분으로 어느 부잣집 머슴살이 10여 년만에 불쌍한 처녀에게 장가도 들고 초가집도 하나 지어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그 집이 바로 저수지 뒤에 밭이었는데, 하루는 백발도사 한 분이 노장군집을 지나가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리는지라 노장군은 그 도사에게 지금 무슨 말을 하였는지 알려달라고 간청했다. 도사가 한참 노장군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당신의 집 옆에 있는 샘물길을 집 뒤로 돌려서 집을 휘감고 흐르게 하면 천석군 부자가 될 터인데 그것도 모르고 가난하게 사느냐”라는 말이다.
그 말을 귀담아 들은 노장군은 부랴부랴 도랑을 파고 물줄기를 집 뒤로 돌렸다. 그러자 그 다음 해부터 풍년이 들어 농사마다 풍작이고 밭을 사면 논이되고 전답은 물 불듯이 불어, 어언 20여 년이 지나자 그 도사의 예언대로 천석군 부자가 되었다.
천석군 부자가 되고 보니 수 십 명의 머슴을 거느리게 되고, 사랑방에는 지나가는 선비나 과객이 날마다 들끓어 대각의 명절을 방불케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노장군은 무식하여 선비과객들이 찾아오는 것이 차츰 싫어지기 시작했다. 수 십 명씩 찾아오는 선비과객의 침식을 제공하는데는 많은 양식이 소모되기 때문에 방문객이 싫어질만도 하였으나 거부의 체면상 박대할 수도 없어 묘책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옛날의 백발도사가 나타났다. 노장군은 한량없이 반가웠다. 노장군은 백발도사를 붙들고 제발 과객이 좀 덜 오는 비책이 있으면 가르쳐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도사가 하는 말이 “지금의 물줄기를 원상태로 다시 돌려라”라는 말을 남기고 어디론지 사라졌다.
이 무식하고 미련한 천석군 노장군은 도사가 말한대로 집 뒤 물줄기를 다시 제자리로 돌리고 말았다. 그러자 이게 웬일인가? 그렇게 붐비던 선비과객의 출입도 줄어들고 흉년은 해마다 계속되어 가세가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자 집안에는 우환이 들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으며, 머슴은 하나둘 집을 나가는 패망의 징조가 보이고 수년간의 한발로 인하여 논은 밭이 되고 많은 전답은 점차 황무지로 변하여 살림도 종말을 보게 되여 노장군은 무일푼의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집안은 패망해도 노장군의 몸은 건강하기 때문에 팔십이 넘도록 일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오고 있다. 노장군의 건강비결은 새마을연수원 넘어가는 고개 오른쪽에 약수가 있었는데 그 물을 식수로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요즘도 저수지 뒤편 노장군의 집터에서는 천석군 부자 때 쓰던 사기와 청기와 조각이 출토된다고도 한다.
김약시와 부전어동
고려의 명문세족 보리공신 광성군 김정(金鼎)은 아들 약채(若采), 약항(若恒), 약시(若時) 삼형제를 두었다. 장남 약채는 문과에 급제하여 좌사의대부로 조반의 옥사를 다스리고, 조선 개국 후에는 관직에 나아가 대사헌,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차남 약항은 문과에 급제하여 주부가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강원도 염문계점사, 집의를 지냈고, 개국 후에는 대사성이 되고 광산군에 봉해졌다. 셋째 약시는 사마시와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다.
음촌(陰村) 김약시는 태조 이성계와 동갑으로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그는 대과 소과를 태종과 나란히 합격하였다. 이렇다면 김약시가 조선의 개국을 도와 현실과 타협하였다면 고관대작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형과는 생각을 달리했다.
공양왕 4년(1392)에 고려가 망하자 약시는 망국의 한을 안고 송도(松都)를 떠나 부인과 함께 걸어서 남쪽으로 향하였다. 망국의 신하가 무슨 체면으로 말을 타고 길을 떠나겠는가? 발이 부르트고 힘이 빠져 더 이상 걸을 수 없었으나,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한강을 건너서 남한산성 남쪽 금광동 산골짜기에 이르렀다.
김약시 부부는 우선 급한 대로 나무를 얽어 만든 집에 풀을 뜯어 지붕을 만들고 겨우 비바람을 막고 살았다. 의관은 남루하고 행동은 슬픔에 젖어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이따금 마을 사람들이 와서 물어봐도 대답이 없고, 혹은 술이나 음식 등을 가져와 대접해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살고 있는 마을을 부전어동(不傳語洞)이라 하였다.
그는 항상 하늘을 쳐다보고 슬퍼함이 얼굴에 나타나 사람들은 그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태조가 그를 찾아 나섰다. 마침내 광주 금광동에서 김약시를 찾아내었다. 태조는 원래의 관직을 주고 다시 억지로 벼슬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김약시는
『병을 앓아서 앞을 보지 못한다.』
고 핑계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태조는 김약시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대접을 더욱 후하게 하였다. 그래서 어서로서 특별히 성명방의 집 한 채를 하사하고 말미에 임금의 호인?송헌(松軒)?두 글자를 써 주었다. 옛날의 교분을 생각해서 대접한 것이다.
김약시는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좋지 못한 시기에 태어나서 종묘사직(宗廟社稷)의 망함을 직접 보고도 죽지 못하고 또 훌쩍 속세를 벗어나 멀리 숨지도 못하는 것은 선인(先人)의 무덤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죽거든 곧 여기에 장사하되 봉분도 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고 다만 둥근 돌 두 개를 좌우에 놓아두어 망국의 천부인을 표시하는 것으로 족하다.』
고 하였다. 그가 죽자 자손이 그 유명대로 하였다.
이렇게 망국신으로 두문불출하고 항상 고려를 생각하며 단대리 고개에 올라 송도를 향해 한을 달래곤 하였다.
세상에 부귀영화를 멀리하고 산골짜기에 숨어서 일편단심으로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으랴! 그래서 김약시에 관한 사적은 없고 다만 이야기로 구전될 뿐이다.
우암 송시열은
『김약시는 신라?고려시대의 미자와 기자에 견줄만한 두 어진이가 있다.』 고 하였다.
도암 이재는
『한결 같은 적심(赤心)은 금석을 꿰뚫기에 족하고 천지를 통할 수 있다.』 고 하였다.
이 두 현인의 말 속에서 김약시에 대한 평가는 모두 함축되어 있다고 하겠다. 성남시 단대동의 단대리(丹垈里) 고개는 김약시가 일편단심으로 고려를 생각하며 북망재배(北望再拜)하던 곳이다.
조선조 현종 때에 8대손 승지 우형(宇亨)이 야대를 당하여 유사에 대하여 언급하니, 왕이 재삼 찬탄하며
『너의 할아버지의 절조는 가히 기이하다고 할만하다.』 고 하였다.
광주의 선비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음촌 같은 고상한 절개로서 아직까지 현양(顯揚)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의 수치이다.』
하고 순조가 행차할 때에 소리 높여 청원하였다. 임금이 연유를 듣고 명하기를
『의정부에서 의논하여 실시하라.』
고 하였다. 그리하여 남공철이 시장을 지어 포상을 논의하고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추증하고 충정(忠定)의 시호를 내렸다.
1969년 그의 묘는 광주군 실촌면 삼합리 공민산으로 천묘했다.
이집과 하대원동의 묘
광주(廣州)의 토성 광주 이씨(廣州李氏)의 시조 이집은 이자성의 7세손인 당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5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아전 계급이었던 광주 이씨 가문을 일조에 혁신하였다. 그런 중에서도, 이집은 문장과 절개로 세상에 크게 알려졌다.
이집에 대한 옛 기록들을 요약해 보면, 고려 충숙왕 14년(1327)에 태어나 초명은 원령이고 호 는 둔촌이다. 문경공 안보(安輔)에게 글을 배웠으며, 충목왕 3년(134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최원도는 이집과 과거 동기생으로 영천 최씨이며, 호는 천곡(泉谷)이다. 이집은 진작에 요승 신돈의 화를 피하여 그를 찾아왔다. 이집은 개경의 용두산 아래 살면서 학문지절이 뛰어난 폭넓은 교유를 하고 있었는데, 신돈의 전횡을 비판한 것이 화근이 되어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집은 무엇보다도 70이 가까운 아버지에게 미칠 화를 염려하여 기동이 거북한 아버지 를 등에 업고 낮에는 숨고 밤에 산길을 택해가며 멀고도 험한 야행천리로 영천까지 내려 온 것이었다.
이집 부자가 가까스로 영천에 당도한 그 날은 마침 최원도의 생일이어서 인근의 많은 주민들까지 모여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집이 아버지를 바깥채 툇마루에 내리고 한숨 돌리는데 최원도가 나왔다. 이리하여 둔촌과 천곡 두 친구는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천곡의 태도는 참으로 뜻밖이었다.
반가와 할 줄만 알았던 천곡이 둔촌을 보자 대노하면서
『망하려거든 혼자나 망할 일이지 어찌하여 나까지 망치려고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복은 안아다 주지는 못할망정 화는 싣고 오지 않아야 할 것이 아닌가』
라고 소리치며 당장에 내모는 것이었다.
물 한 그릇 달라는 청마저도 거절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천곡은 둔촌이 떠나자 둔촌이 앉았던 바깥채 뒷마루마저 불을 질러 태워버렸고, 잔치 손님들이 그 연유를 묻자 역적이 앉았던 자리는 태워야 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둔촌은 이런 박대를 받고 떠나면서도 천곡의 깊은 마음을 짐작했다. 천곡의 박대가 진심이 아니라 포박령이 내려진 친구를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것이 두 사람 모두에게 이롭다고 생각한 것이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둔촌은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산 속에 숨어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과연 천곡은 날이 어둡자 둔촌을 찾아 나섰다. 노부를 등에 업었으니 멀리는 가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급히 둔촌이 간 쪽을 탐색하여 쉽게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두 지기지우는 서로 끌어안고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고,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려 천곡은 둔촌을 집으로 데려가 다락방에 숨겼다.
이렇게 둔촌의 피신 생활은 시작되었고, 그것이 4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둔촌 부자를 다락방에 숨긴 뒤 천곡은 그것을 가족들에게도 비밀로 하자니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식욕이 왕성해졌다고 속여 밥을 큰그릇에 고봉으로 담고 반찬도 많이 가져오게 하여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그러다가 이 광경을 심부름하는 여종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큰일이었다.
천곡은 당황하여 여종을 불렀다. 그리고 만약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두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다는 것을 간곡히 설명한 뒤 함구를 당부했다.
그러자 일의 중대성을 알게 된 여종은 상전을 안심시키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고 말았다. 이 여종의 이름은『제비』로 전해지고 있으며, 한문으로 된 기록에는 연아(燕娥)로 되어있다. 그 뒤 영천에 수색이 시작되어 신돈의 부하가 천곡의 집에 들이 닥쳤으나 물 한 그릇도 주지 않고 둔촌을 내치는 것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의 증언 등으로 무사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또 큰일이 일어났다. 둔촌이 영천으로 피화한 그 다음 해인 공민왕 18년(1369)에 업고 피신한 아버지 당(唐)이 별세한 것이다. 아무 준비가 없었음은 물론 장례도 비밀로 치루어야 할 입장이어서 그 어려움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바가 있었다. 천곡은 자신의 수의를 내어다가 예에 어긋남이 없이 염빈을 하고 그의 모부인 묘 아래 장사지냈다. 영천의 나현에 있는 세칭 『광주 이씨 시조공묘』가 바로 그 묘인 것이다.
이런 연유로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음력 10월 10일이 되면 나현에서는 양가가 같은 날에 묘제를 지내고 서로 상대방의 조상에게도 잔을 올리고 참배를 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때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충비 연아(제비)의 묘에도 양가가 모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그리고 광주 이씨 대종회에서는 천곡의 모부인 묘에 상석을 기증하였고, 1985년에 이를 다시 개수하는 등 하여 양가의 우의가 오늘의 후손에게도 감동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신돈이 제거되고 둔촌이 4년간의 피화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뒤의 생활은 위에서 옛 기록을 인용한 바와 같거니와 사후 현종 10년(1669)에 사림에서 『둔촌의 학문과 지절은 삼은(三隱)과 병칭 할 만하다』하여 광주의 암사 강변(지금의 서울시 암사동 산1)에 구암서원(龜巖書院)을 세웠으나 고종 8년(1871)에 서원 철폐령에 의해 헐리고 지금은 비만 남아 있다.
그리고 가까운 둔촌동은 둔촌의 호를 딴 지명인데, 지금은 서울시로 편입되었지만 옛 광주 땅인 이 지역 일대가 광주 이씨의 세거지로 둔촌동 이후에 크게 부각되었으며, 자손들의 학문과 관계 진출이 또한 혁혁하여 광주 이씨는 명실상부하게 광주의 대표적 토성으로 위치를 굳혔으니, 둔촌 이집을 그 시조로 모시는 연유를 짐작할 만하다.
한이 서린 망경대와 조견
형과 아우가 마주앉아 팽팽한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윤(胤)아! 다시 한 번 생각해서 마음을 돌리려므나!』
『형님이야말로 이제라도 마음을 돌리시고 저와 함께 낙향하시는 것이 어떠세요?』
『너는 그것을 말이라고 하느냐? 목숨을 걸고 싸운 덕으로 이제 우리 집안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됐는데 무엇이 안타까워서 낙향을 한단 말이냐!』
『정 그러시다면 형님이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저는 이대로 시골로 내려가겠습니다.』
『사람이란 어디까지나 시의에 맞추어 살 줄 알아야 한다. 내가 개국공신록(開國功臣錄)에 네 이름을 넣어서 호조전서(戶曹典書)라는 벼슬이 내렸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그러느냐? 지나간 일은 이제 다 잊어버리고 나와 함께 조정에서 일을 보자.』
『형님 말대로 하면 부모를 팔아서도 벼슬을 해야겠군요?』
『네 이놈! 입을 닥치지 못하겠느냐! 방자함이 지나치구나.』
두 눈에 쌍심지를 돋구고 형을 바라보던 조윤(趙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조윤은 고려 말엽의 유신으로서 이성계를 도와 이조혁명을 도모한 공신의 한 사람인 조준의 아우였다.
일찍이 형인 조준(趙浚)이 반정에 가담하려는 것을 눈물로써 말렸으나 형은 듣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이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 벼슬을 내렸지만 받지를 않았다.
그리고서 이름인 윤(胤)자는 견(犬)자로 고쳤으며 자를 종견(從犬)이라 스스로 불렀다.
<나라를 잃고도 죽지 못함은 개와 같은 것이며 또한 옛 주인을 잊지 못함은 충실한 개와 같다.>
는 뜻이라 하였다.
그 후에 산 속으로 깊숙이 숨어서 멀리 고려의 서울이었던 개경을 바라보며 소리내어 통곡을 하며 지냈다.
조윤이 광주군 언주면에 있는 청계산 봉우리에 올라 하염없이 눈물지으며 송도를 바라보았다 해서 그 봉우리를 망경대(望京臺)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후에 이태조가 그의 충절을 높이 여겨 옛 벗의 예를 갖추고 손수 산으로 그를 찾아갔으나 태조를 만나서도 절 한번 하지 않고 말하기조차 부끄럽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도 태조는 조윤을 가엾이 여겨
『산에서 내려가고 싶지 않으면 네 마음대로 하라.』
하고, 석실을 지어서 거처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윤은 태조의 그와 같은 호의를 물리치고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도망하여 양주(楊洲)에 있는 송산(松山)으로 숨어 버렸다는 것이다.
서하(西河) 임규(任 奎)가 찬한 송산공 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의 초휘는 윤(胤)이시고 여조(黎朝)의 거경(巨卿)이신 정숙공(貞肅公:仁規)의 증손이시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도하시고 어른을 공경하시며 공부에 힘쓰셨고 예의를 잘 지키셨으며 포은 정공(圃隱 鄭公) 몽주(夢周)와 더불어 친히 사귀었다. 장성함에 이르러 정공(鄭公)의 추천한 바 되어 화관(華貫) 벼슬을 하시고 왕께서 글을 읽으실 때 출입하시어 지신사(知申事)란 벼슬에 이르셨다. 고려 말에 정치가 혼란하여 나라 일이 날로 어지러울 때에 공의 형님 준(浚)이 난을 일으킬 뜻을 가지심을 짐작하시고 일찍이 눈물을 머금으시고 일러 가로되 「우리는 나라에서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흥하고 망하는 것을 국가와 같이 할 것이요 또한 달가(達可=정몽주의 호)는 국가의 주석(柱石)이니 한마디 말과 한가지 일이라도 달가의 의사와 다른 길을 구한다면 이는 곧 국사(國事)를 방해하며 나라가 망하는 것을 재촉하는 일이라」하시며 그 언사가 심히 격절(激切)하니 형님 준께서 그 지조(志操)가 굳고 굳어 가히 앗을 수 없음을 알고 조정에 의논하여 공으로 하여금 영남에 출안(出按)케 하였다. 공께서 일을 마치시고 조정에 돌아오시니 조정의 의논이 모두 가로되 일국이 병이 나서 이를 물리쳐야 하겠는데 이제 윤은 일을 다 마치지 않고 총총히 돌아온 것이라 이르고 또 다시 공으로 하여금 출안케 하니 이후로는 공이 내직에 있지 못하게 한 것으로 생각하시고 공께서는 영남루에 다시 오르시어 우국시(憂國詩)만 홀로 읊으셨다. 환조치 못한 채 여조의 운명이 다하였으므로 공이 황황히 두류산(頭流山)으로 은거하시니 태조가 그 재질을 가석히 여기사 호조전서(戶曹典書)에 명하고 글로써 부르시니 공께서 이를 물리치고 받지 아니하시고 답하여 가로되 「송산에서 고사리를 캐먹는 것이 소원이요 성인(聖人-임금)의 신하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하시고 이름을 견(犬). 자를 종견(從犬)으로 고치시니 이는 나라는 망하였는데 구차히 목숨만 살아있으니 개와 같고 또한 개도 주인을 연모하고 의리를 쫓는 다는데서 취한 것이다. 두류산으로부터 청계산(淸溪山)으로 옮기셨으니 이곳은 정숙공께서 마음 편히 정양하시던 곳으로 영당(影堂)을 모신 곳이다. 여기 오시어서는 때로 높은 봉우리에 오르시어 탄식도 하고 혹은 맑게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통곡하시고 때로는 구름 한줄기가 송악(松岳)으로부터 청계에 연해 뻗치니 이는 공의 애국하심과 충성하심에 하늘이 감동한 바라하고 사람들이 그 산봉(山峰)을 망경대(望京臺)라 칭하고 그 후에 망경대가(望京臺歌)가 세상에 전하여 불려졌다.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어느 날 준(浚)과 더불어 수십 기의 말 탄 사람을 데리고 청계에 행차하시어 봉영당(奉影堂)에 이르러 공과 만나기를 청하니 공께서 서편방에 누운 채 이불로 얼굴을 가리시고 끝내 명 받을 기색이 없으시니 준께서 이불을 어루만지시며 가로되
『나와 서로 보지 못한 지가 수년인데 형제간의 그리운 정이 매우 섭섭하고 안타깝지 않은가』
하시니 공께서 이불 속에서 답하시어 가로되『나라가 깨지고 집안이 망하였으니 부모도 없고 임금도 없습니다.』
하시니 준이 가로되『군명(君名)이 이미 훈축(勳軸)에 들었으니 어찌 무군(無君)이라 하는고!』
공께서 답왈
『훈축 명하(名下)에 부서(附暑)를 누가 하였습니까?』
하시니 준께서 슬퍼하시며 잠시 후 또 다시
『내 어찌 너의 절조(節操)를 더럽히겠느냐 우리 형제 여섯 사람이 세상에 있지만 서로 의지할 사람은 나와 그대뿐인데 내 목전에서 그대가 화를 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있겠는가? 군이 견자로 개명한 것을 듣고 여러 공신들이 공훈을 집행함에 나의 마음이 어떠하였는지 가히 알리로다』
인하여 태조께 나가시어 고하되 『신의 아우의 성격이 굳고 좁아 한번 먹은 마음을 변치 않으니 무가 내합니다』
하였다. 태조 가로되
『나를 아니 보고자 함은 우리 조정에 신하로서의 일을 아니할 의사이나 나로 더불어 전에 친구로서의 사귐이 있으니 주빈지레로 대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시니 준께서 명을 받으시고 다시 들어가시어 이불을 걷고 손을 잡고 나오시니 태조께서 준을 보시고 명하여 앉은자리에서 후면으로 피하게 하였다. 이는 아우와는 주빈의 격으로 형과는 군신의 격으로 서로 보는 것이 예의상 불편하기 때문이다.』
태조가 공과 더불어 서로 읍하고 마주앉아 가로되
『나를 도와 나라를 잘 다스린다면 이 어찌 백성의 복이 아니 되리요』
하시니 공께서 눈을 쏘고 한참 바라보고 계시다 북면(北面)하시고
『여조(麗朝)의 신하로 여조를 섬기던 기억을 하십니까』
하시고 전의 일을 말씀하시면서 그 어의(語意)가 불손하였다. 태조께서 웃으면서 그를 용서하시고 크게 탄식하시며 가로되
『조견의 지조가 금석과 같이 굳으니 가히 앗을 수 없다』
하시고 말을 몰고 내려오며 가로되
『청계 일대를 조견을 위하여 봉지로 내리고 그 사이에 석실(石室)을 지어 그 정절(貞節)을 숭표(崇表)하라』
하시었다. 지금 원통동에 있는 석축(石築)이 곧 그 유지이다. 공께서는 이 석실은 새로 된 왕의 명으로 지은 것이니 구신(舊臣)이 살 바 아니라 하시고 즉시 양주 송산(楊洲 松山)으로 옮기시고 혹 가시다 송도에 들르시면 선죽교(善竹橋)며 반월대(畔月臺)의 터를 돌아다니며 성곽(城廓)이 퇴락한 것을 보고 탄식하시고 비장히 여기며 한숨 쉬시고 나라가 망한 한탄에 발을 굴러 땅을 치고 흐느껴 울며 참을 수 없어 돌아가시니 남은 백성이 보는 자 모두 슬퍼하였다. 공께서 송산(松山)이라 스스로 호(號)를 지으심은 소나무는 마르지 않고 사시 푸르르며 산은 제자리를 옮길 줄 모른다는 의미에서 취하신 것이고 고려의 서울 송악(松岳)을 잊지 않는다는 절조(節操)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공께서 자손에게
『조선조에게는 벼슬을 하지 말고 여조(麗朝)의 은혜에 보답하라』
훈계를 남기고 또한 내가 죽은 뒤에 묘비(墓碑)에 고려안렴사(高麗按廉使)라 새기고 조선 개국 공신호(朝鮮 開國 功臣號)는 새기지 말 것을 명하시고 또 다시 두 아드님 이름을 석산(石山)과 철산(鐵山)으로 개명하시니 이는 곧 굳으신 절개의 의미를 가르치신 것이다. 공께서 서거하시매 세종(世宗)께서 그 부음을 들으시고 심히 애통하시며 둔촌근록(遁村近麓)에 장례하라 명을 내리셨다. 모든 자제들이 유명(遺命)을 굳이 지키시지 못하시고 조선조에서 내린 벼슬 이름을 새겨 비를 세웠더니 그 날 밤에 뇌성벽력이 나서 그 비를 부셨는데 이조에서 내린 벼슬이름 있는데 까지만 부러져 버리고 조공지묘(趙公之墓)란 네 글자만 남아 있어 세상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공께서 여조 말에 왕실이 장차 망할 것을 짐작하시고 개연히 일어나 회복할 의지를 품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시니 수 백 명이 앉을 만한 넓은 석굴이 있어 공께서 잠시 그 굴 옆에서 쉬셨더니 약간 어두워질 무렵 한 짐승 말 형상을 한 사람이 호랑이와 표범과 사슴과 노루 등 수 백 마리를 앞에 몰고 굴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공께서 탄식하며 말씀하시기를
『이는 짐승이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여조가 망하는 것을 가히 구하기 어렵도다』
하시고 통곡하시며 돌아오셨다.
공께서 지신사(知申事)의 직무로 계속하여 영남에 가셨다. 조정에 돌아오심을 허락지 않을 때 조선(朝鮮)이 천명(天命)을 받았으니 공의 나이 42세이었다. 통곡하시고 두류산에 피해 숨으시다 광주 땅 청계산에 옮기어 계셨으니 그곳은 삼세영정(三世影幀)을 걸어 모신 봉영루(奉影樓)가 있고 그 누 옆에 정숙공께서 임금을 축원하시던 절이 있으며 절 뒤에 공께서 송경을 바라보시던 망경대(望京臺)가 있다. 태조께서 친히 나오시어 석실을 짓도록 명하였던 터가 지금에도 원통동(圓通洞)에 남아 있다.」
조견의 역사가 남은 곳은 청계산 상봉의 망경대(望京臺),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의 묘소(墓所), 충남공주시 우성면 보홍리 사당(祠堂),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봉암리 정절사(旌節祠), 경기도 의정부시 송산마을에 송산사(松山祠)가 있다. 조견과 이백유(李白由)는 동서지간이다. 그래서 이백유와 조견은 여수동에 고이 잠들었는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