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인물
고려 말의 학자이며, 초명은 원령(元齡)이요 호는 둔촌(遁村) 또는 호연(浩然)이요 관향은 광주이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문장과 절개로 알려졌다. 일찍이 신돈에게 반항하다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아버지를 업고 영천(永川)의 친구 최원도의 집에 숨어 살았다. 1371년 신돈이 죽자 봉순대부 판전교시사를 역임하다가 벼슬에 뜻이 없어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독서로 소일하였다. 묘소는 하대원동에 있으며 저서로는 『둔촌유고집』(광주이씨종중 소장)이 있다.
고려조 수절의신(守節義臣)의 한 사람이다. 초명은 윤(胤)이요 시호는 평간(平簡)이요 관향은 평양이다. 일찍이 불교에 입문하여 여러 사찰의 주지를 지내다가 30이 넘어 환속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안렴사에 이르렀다. 형 조 준(趙浚)이 이성계를 도와 모계하는 것을 만류하였으며, 고려조가 망하자 청계산에 은둔하였다. 이태조가 평성부원군 개국공신으로 대우하여 여러 번 부르고 또한 직접 찾아가도 나가지 않고 양주의 송산(松山)으로 옮겨 은둔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묘소는 여수동(현재 하대원동)에 있으며 양주 사천우(沙川宇)에 남을진(南乙珍)과 함께 배향되었다.
고려 말의 문신이며 청백리이다. 초명은 도(途)요, 자는 백평(伯平)이요, 호는 탄천(炭川)이요, 관향은 광주이다.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내한림교리 관찰사를 거쳐 보문각직제학 재임 중에 소도(昭悼)의 변란(1400년)이 일어나자 자기의 바른 주장으로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웠으나 이방원(태종)의 도움으로 극형을 면하여 광주 탄천(성남시)에 은일자적하였다. 세종 즉위 초에 형조 우참의로 임명하였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후에 청백리로 선정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하대원동 산 3-1에 있고 저서는 『탄천선생유고』(국립중앙도서관소장)가 있다.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며 자는 차산(次山)이요 호는 용헌(容軒)이요 시호는 양헌(襄憲)이요 관향은 고성이다. 1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조에서 사복시승 공조좌랑 예조좌랑 병조정랑을 역임하였고 조선조에서 좌부승지 좌명공신이 되고 철성군에 봉해졌다. 그 후 대사헌 관찰사를 역임하고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 온 후 평양부윤 중군총제 참지의정부사 대사헌 판한성부사 추증익대좌명공신이 되고 예조판서 이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의정부참찬 찬성사 우의정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사헌부의 탄핵으로 여산에 유배되어 병사하였다. 안동 명호서원(明湖書院)에 배향되고 묘소는 도촌동(돌마면 가차곡 율리)에 있었으나 1990년 광주시 목리로 이장하였다. 저서로는 『철성연방집』권2에 수록된『용헌집』(고성이씨종중 소장)이 있다.
고려 말의 문신이며 자는 순중(純中)이요 호는 상촌(桑村)이요 관향은 경주이다. 1374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덕령부주부였으나 왕명거역으로 돌산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전교부령 파사재시사 대사성 세자좌보덕 판전교시사 좌상시 형조판서를 역임하다가 고려조가 망하게 되자 안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조 태종조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자결하였다. 절의충신이라고 칭송을 받았으며, 묘소는 분당동에 있다.
조선전기 인물
의령부원군이며 조선조 개국공신으로서 태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남재(南在)의 아들이다. 봉정대부 병조의 의랑을 역임하고 26세에 서거하였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아들들이 모두 관직에 올라 첫째 아들 남지(南智)는 좌의정을, 둘째 아들 남간(南簡)은 직제학을 각각 역임하였으며 셋째 아들 남휘(南暉)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貞善公主)와 혼인하였다. 관향은 의령이고 묘소는 태평동 산 3-1에 있다.
조선조의 문신으로 선조조의 공신이다. 자는 자문(子文)이요 시호는 평간(平簡)이요 관향은 전의이다.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사인을 거쳐 세조의 정란공신으로 통정대부 병조참의가 되고 좌익공신에 책록되었다. 서거한 후 정헌대부 예조판서 수문전대제학 금성군(金城君)으로 추증되었고 묘소는 대장동에 있다.
조선조의 문신이며 자는 자룡(子龍)이요 시호는 안양(安襄)이요 관향은 안동이다. 음보로 현릉직장 상서승이 되고 계유정란에 수충경절좌익공신이 되고 전농시소윤 중추원첨지사를 거쳐 당상관에 오르고 문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예문관제학을 거쳐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지고 한성부윤 관찰사겸개성부유수를 역임하였다. 청계산에 은퇴하여 무진정을 짓고 금토동에 거주하였다. 글씨를 잘 썼다. 묘소는 금토동에 있었으나 다른 지역으로 이장되었다.
조선조의 문신이며 자는 덕여(德與)요 시호는 문경(文景)이요 관향은 광주이다. 17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20세에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부수찬 강서원우찬독 경연사정을 역임하고 정인지의 천거로 사가독서 하였다. 뒤이어 의정부검상(檢詳)을 거쳐 좌익공신으로 책록되고 광성군(廣城君)에 봉해지고 이조참의 겸 세자보도 도부승지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야탑동에 있다. 『국조보감』을 수찬하고 『치평요람』과 『의방유취』를 수교 간행하였으며 『북정록』(北征錄)을 찬진하였다.
조선조의 문인이며 자는 자순(子順)이요 시호는 문정(文靖)이요 관향은 청주이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정자 수찬 교리 겸 문학을 역임하고 세자(덕종)에게 경학을 가르쳤으며 좌필선 집의 예문관직제학 세자우보덕 좌보덕 지병조사 병조참의 우승지 좌승지 공조참판 이조참판 겸 세자시강원우부빈객을 역임하고 이조판서를 거쳐 익대공신에 책록되고 서평군(西平君)에 봉해지고 좌리공신에 책록되고 좌찬성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율동에 있으며 『경국대전』편찬에 참여하고 『의방유취』의 간행을 주관하였다.
조선조의 문신이며 자는 경위(景祁)요 시호는 공장(恭長)이요 관향은 광주이다. 20에 생원이 되고 음보로 종묘녹사가 되었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군기사직장 이조정랑 성균관직장겸의정부검상 사인을 거쳐 익대공신에 책록되고 광천군(廣川君)에 책봉되었다. 이어 도승지 이조판서 좌리공신 호조판서 전라도관찰사 우참찬이 되고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 왔다. 동지성균관사 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다. 『대전속록』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묘소는 야탑동에 있다.
조선조 문신이며 자는 사고(士高)요 호는 사봉(四峰)이요 관향은 광주이다. 22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농시주부 성균관직강 응교를 역임하고 33세에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예조참의 한성부윤 대사헌 형조참판 좌리공신에 책록되었다. 광원군(廣原君)에 봉해지고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예조참판 때 주청사로 재차 명나라에 다녀왔다. 한성부윤 이조판서 병조판서 호조판서 관찰사 좌찬성을 역임하고 무오사화를 일으키는데 가담하고 파직되었다가 다시 광원군에 봉해졌다. 묘소는 하대원동에 있으며 『신편동국통감』을 편찬하여 그 서문을 짓고 시무(時務)12조를 지었다.
조선조 문신이며 자는 방형(邦衡)이요 관향은 광주이다. 19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무술에도 뛰어났다. 선전관 회령도사 지평 도체찰사종사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명나라에 사은부사로 다녀 왔다. 이어서 서북면도원수 판중추부사 좌찬성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고, 갑자사화로 안동에 유배되어 극형을 받았으나 후에 신원되었다. 야인토벌에 공을 세우고 경상우도의 지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광남군(廣南君)에 봉해지고 묘소는 야탑동에 있다.
조선조의 문신이며 자는 방옹(放翁)이요 호는 청파(靑坡)요 시호는 문광(文光)이요 관향은 고성이다. 14세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26세에 온양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직강이 되고 뒤이어 발영시에 2등, 문과중시에 재차 급제하여 문학 응교 장령 대관 판결사 대사성 관찰사 호조참의 예조참의 형조참의를 역임하였다. 그후 한성부윤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정조사로 명나라를 다녀와서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고부청시청승습부사로 명나라에 재차 다녀 와 경기도관찰사 대사헌 호조참판 동지중추부사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도촌동에 있으며 저서로 『청파집』(규장각소장)이 있다.
조선조 문신이며 자는 자예(子藝)요 시호는 공간(恭簡)이요 관향은 청주이다. 음보로 여러 관직을 거쳐 좌부승지 전라도관찰사 개성부유수 한성부좌윤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명나라에 다녀왔다. 대사헌 병조참판 공조참판 공조판서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중종반정으로 정국공신이 되고 서천군(西川君)에 봉해졌다. 묘소는 율동에 있다.
조선조 문신이며 자는 중권(仲權)이요 관향은 광주이다. 음보로 와서별제 내자시주부 장악원주부 사헌부감찰 장례원사평 세자시강원보덕 통정대부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갑자사화에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예조참의 병조참의 장례원판결사 광주목사 전주부윤 해주목사 돈령부도정판결사 관찰사 승정원좌승지 도승지 예조참의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효행이 두터웠고 검소하였다. 묘소는 하대원동에 있다.
조선조 문신이며 자는 희중(希仲)이요 호는 입암(立巖)이요 관향은 여흥이다.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가독서하고 내외직을 역임하여 부제학이 되고 위사공신이 되었다. 안명세(安名世)가 을사사화의 전후를 기록한 시정기(時政記)를 제지하려다가 공주로 유배되어 서거하였다. 저서로는 『입암집』(규장각소장)이 있다.
조선조 문신이며 자는 경로(景老)요 호는 사암(思菴)이요 시호는 충정(忠貞)이요 관향은 동래이다. 2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응시)에 장원급제하여 예빈시주부 예조정랑 사헌부지평 직제학을 역임하고 중국 연경에 다녀왔다. 양주목사 청주목사 철원목사를 역임하였고 모친에 대한 효행이 지극하였다. 좌찬성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신흥동(남음촌 옹정산)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장되었다.
조선조 문신이며 자는 가겸(可謙)이요 호는 북애(北崖)요 시호는 의간(懿簡)이요 관향은 한산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아천군(鵝川君)에 봉해졌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수내동에 있으며 저서로 『북애시고』(규장각소장)가 있다. 20) 정윤희( 丁胤禧 1531-1589)
조선조 문신이며 자는 경석(景錫)이요 호는 고암(顧庵) 또는 순암(順庵)이요 본관은 나주이다. 21세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25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적 정언 병조좌랑 수찬 지평 이조정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 하였고, 이어서 사인 장령 응교 집의 사복시정을 역임하였으며 다시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하고 판결사 장단부사 예조참의 호조참의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사륙문(四六文, 四六騈儷文)에 뛰어나고 홍문관과 예문관의 많은 문서를 찬술하였다. 묘소는 백현동에 있다. 저서로 『고암집』(나주정씨문중 소장)이 있다.
조선조 문신이며 자는 이원(而遠)이요 호는 송암(松菴)이요 시호는 충정(忠正)이요 관향은 안동이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주서 병조좌랑 춘추관기사관 우승지 좌승지 형조참의 관찰사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진강에서 전투하였으나 패배하고 권율장군과 함께 의병에 가세하여 한양 탈환작전에 참가하고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화친에 반대하여 왜군토벌을 주장하였다. 묘소는 금토동에 있다.
조선조 문신이며 자는 상중(尙中)이요 호는 중호(重湖)요 시호는 헌민(憲敏)이요 관향은 칠원(漆原)이다. 20세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그 이듬해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기사관 승정원주서 전적 정언 홍문관수찬 예조좌랑 병조좌랑 장령 교리 동래부사 상주목사 도승지 예조참판 영남감사 한성판윤 형조판서 호조판서를 역임하고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이 되었으며 칠성군(漆城君)에 봉해졌다. 두 차례나 연경에 다녀오고 비국유사당상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는 왕세자를 호종하고 검찰사 도순찰사가 되어 시국타개에 노력하였고 시문에 능하였다. 묘소는 하대원동에 있다. 『계사일기』『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고 저서로는 『중호선생문집』(계명대도서관소장)이 있다.
조선조 문신이며 자는 과우(寡尤)요 호는 호봉(壺峰)이요 시호는 영양(榮襄)이요 관향은 여산이다. 명종조에 불교를 배척하고 승려 보우(普雨)를 죽이라고 건의하였다. 3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부교리 평안도관찰사 동면순검사 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몇 차례의 파직과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묘소는 상대원동에 있다. 저서로는 『성학지남』『호봉집』(국립도서관소장)이 있다.
조선조 중기의 문신이며 자는 면숙(勉叔)이요 호는 월탄(月灘)이요 시호는 장헌(莊獻)이요 관향은 청주이다. 3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수찬을 거쳐 영해부사에 재임할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공을 세우고 경상좌도관찰사 병조참판 경상·전라·충청도체찰부사 지중추부사 이조판서 평안도관찰사 판중추부사 우찬성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인조반정으로 관직이 추탈되었다. 중국과 일본에 선위사 사은사로 다녀왔다. 체찰사 재임시절에 화기주조와 병술에 관한 서적을 간행하고 이순신과 함께 거북선 모양의 선박을 건조하였다. 서흥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묘소는 서현동에 있다. 『사서오경』을 교정편저하고 저서로는 『신기비결』『진설』(규장각소장)이 있다.
조선조 중기의 문신이며 자는 욱재(勖裁)요 호는 율헌(栗軒)이요 관향은 청주이다. 39세에 진사가 되어 호조정랑과 현감을 역임하고 4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사서 정언 지평장령 군기시정 군자감정 봉상시정 양서어사 동지사겸지돈영부사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로 낙향하였다. 관직에 재임하는 동안 두 차례 파직을 당하고 유배되기도 하였다. 묘소는 율동에 있다. 『삼체집』(소장자 미상)을 편찬하였다고 전한다.
조선조 중기의 왕손이며 자는 명원(明遠)이요 시호는 충숙(忠肅)이요 관향은 전주이다. 부정과 선전관을 역임하고 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에 왕을 강화도로 호종하였다. 그 후 숭헌대부(崇憲大夫)가되고 현록대부(顯錄大夫)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궁내동에 있으며 1980년에 경기도지방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되었고 묘지명이 발굴되어 있다.
조선조 중기의 문신이며 자는 중지(重之)요 호는 만회(晩晦)요 관향은 안동이다. 4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과 고산도찰방을 역임하였으나 은둔처사로 일생을 마쳤다. 이조참판이 추증되었고 묘소는 금곡동에 있다. 저서로는 『만회집』과 『연송잡기』(규장각소장)가 있다. 28) 이상안( 李尙安 1575-1627)
조선조 중기의 무신이며 자는 정이(靜而)요 시호는 충민(忠愍)이요 관향은 광주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창주첨사 강계부사를 역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정묘호란(1627)이 발발하자 자청하여 별장으로 활약하다가 남이흥과 함께 안주성에서 화약 불더미 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었고 안주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묘소(의관예장)는 하대원동에 있으며 정려문이 있다.
조선조 중기의 무신이며 자는 자호(子豪)요 호는 성은(城隱)이요 시호는 충장(忠莊)이요 관향은 의령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부총관 포도대장 충청도병마절도사 경상도병마절도사 구성부사 안주목사를 역임하였으며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연안부사가 되고 진무공신이 되었다.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고 평안도병마절도사 영변부사를 역임하고 정묘호란(1627)이 일어나자 안주에서 분전하다가 성에 불을 지르고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영의정이 추증되고 부원군이 추봉되었으며 안주 충민사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태평동에 있었으나 도시개발로 인하여 충남 당진군 충장사로 이장되었고 충남도지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조 중기의 문신이며 자는 여사(汝思)요 호는 지전(芝田)이요 관향은 덕수이다. 3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좌부승지를 역임하고 정사원종공신이 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어가를 호종하였으며 병조참판 개성부유수를 역임하고 사은부사로 청나라 심양(瀋陽)에 가서 볼모로 간 세자를 본국의 원손으로 대신케 하였다하여 남양에 유배되었다. 후에 경기도관찰사 지돈영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묘소는 상적동에 있다.
조선후기 인물
조선조의 문신이며 자는 상보(尙輔)요 호는 백헌(白軒)이요 시호는 문충(文忠)이요 관향은 전주이다. 일찍이 진사가 되고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이랑(吏郞)이 되고 중시에 급제하였으며 병자호란(1636)을 당하여 청나라에게 항복하자 왕명을 받들어 대청황제공덕비(삼전도비)의 비문을 지었다. 그 후 세자시강원 문관으로 심양(瀋陽)에 갔다가 돌아와 참찬 대사헌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효종이 즉위하자 왜구에 대비하여 성지를 수축하고 군대를 양성하려는 문제로 책임을 지고 백마산성에 감금되었다가 돌아와 영돈영부사가 되어 기로사에 들어가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평생 『소학』과 『논어』를 거울삼아 수양하였고 만년에는 『근사록』과 주자서(朱子書)를 탐독하고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으며 장릉지장(長陵誌狀) 편찬에 참여하였다. 묘소는 석운동에 있고 『백헌문집』(규장각소장)이 있다.
조선조 선조의 왕자 영창대군이다. 유일한 정궁의 소생이므로 선조는 이미 왕세자로 책봉된 광해군 대신에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삼고자 한 일이 있었는데 선조의 갑작스런 붕어로 광해군이 즉위하자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되고 영창대군은 서인이 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14세에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다. 수정구 태평동 골목길 공사 중에 영창대군의 묘지명이 발견되었다.
조선조 후기 학자이며 자는 사성(思誠)이요 호는 탄옹(炭翁)이요 관향은 안동이다. 32세부터 대군사부로 여러 차례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59세에 한성부우윤이 되었으나 윤선도의 예송문제로 파직되었다가 64세에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송시열과 같은 기호학파로서 예론에 해박하였으며 좌찬성에 추증되고 묘소는 금곡동에 있다. 저서로 『탄옹집』(규장각소장)이 있다.
조선조 후기 문신이며 자는 노천(老泉)이요 호는 취촌(醉村)이요 시호는 충헌(忠憲)이요 관향은 덕수이다. 20세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33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다시 43세에 문과 중시에 합격하였으며 승지 예조참판 황해도관찰사 예조판서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고등동에 있다. 『경종실록』편찬에 참여하고 백세청풍비(해주)와 청평묘비의 글씨가 있다.
조선조 후기의 문신으로서 청백리이며 자는 유안(幼安)이요 호는 동산(東山)이요 시호는 문청(文淸)이요 관향은 한산이다. 28세에 진사가 되고 36세에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예조참의로 있을 때 조부가 일찍이 임진왜란으로 죽은 까닭으로 왜서회답(倭書回答)의 예를 회피하기 위하여 사직하였다. 그 후 호조참의가 되어 탕평론을 배척한 사건으로 파직되었으며 후에 경상감사에 보직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다시 승지의 보직도 거절하고 합천군수로 부임하여 기민을 구제하였다.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고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묘소는 수내동에 있다.
조선조 후기의 문신이며 자는 성뢰(聖賴)요 호는 관양(冠陽)이요 관향은 전주이다. 32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가 되고 노론과 소론의 당쟁에서 중도를 지켰으며 지평 교리 관찰사 암행어사를 역임하였고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대제학 재임 중에 정주와 해남에 유배되었다가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과천에 은거하였으며 묘소는 석운동에 있다. 저서로 『관양집』(한국전력 산기문고 소장)이 있다.
조선조 후기의 문신이며 자는 덕재(德哉)요 호는 뇌연(雷淵) 또는 소화(小華)요 시호는 문청(文淸)이요 관향은 의령이다. 23세에 진사가 되고 강릉참봉 세자익위사시직 영춘현감을 역임하고 42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 승지 원손보양관 예문관제학 좌부빈객 대사헌 대제학 예조참판 우빈객을 역임하였다. 문장과 시에 뛰어나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묘소는 율동에 있다. 『천의리편』을 편찬하고 저서로는 『뇌연집』『명사정강』(규장각소장)이 있다.
조선조 후기 영조, 정조, 순조 때의 문신이며 자는 원평(元平)이요 호는 사영(思潁)이요 시호는 문헌(文憲)이요 관향은 의령이다. 3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50여년간 많은 관직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경전을 널리 연구하고 한(漢) 당(唐) 송(宋)대의 많은 글을 읽어 고문(古文)에 밝았고, 특히 구양수(歐陽修)의 글을 본받았으며 시에도 뛰어나서 중국에도 문명을 떨쳤고 서화론에도 매우 조예가 깊었다. 『헌종실록』의 졸기에는 ‘키가 크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공거를 맡았으나 뇌물이 행해지지 않았다. 진퇴하고 주대하는 데 본받을 만한 것이 있어서 조정의 진신이 모두 칭찬하였다고 하였다. 묘소는 금토동에 있으며 저서로는 『금릉집』『귀은당집』『영옹속고』『영옹재속고』『고려명신전』(규장각 소장) 등이 있다.
조선조 후기의 문신이며 자는 문보(文甫)요 호는 의재(宜齋)요 관향은 의령이다. 29세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세마 호조좌랑 감찰 함양군수 무주군수를 역임하고 4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세자시강원 등의 요직과 형조참의 춘천부사를 역임하였다. 문장과 시에 능숙하였으며 대제학에 추증되었고 묘소는 율동에 있다. 저서로는 『남재집』(의령남씨문중 소장)이 있다.
성품이 정정단일하고 희로애락을 잘 드러내지 않았으며 여공을 잘 하고 어른의 뜻을 잘 받들었다. 부모가 편찮을 때는 아무리 덥거나 추워도 약을 다리고 음식을 준비하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20세에 윤광연(尹光演)과 혼인하여 시어머니 지일당(只一堂)과 글을 주고 받았다. 아이들에게 권면하는 글에서 '그저 쓰기나 하고 외우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성현과 같이 되기를 기약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부모들이 딸들에게 독서를 시키지 않기 때문에 부녀가 의리를 알지 못한다는 것과 하늘로부터 타고 난 성품에는 남녀의 차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이 자포자기하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는 천명지성은 도의 본원이며 오륜과 오상의 이치는 모두 인심이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심통성정론을 따랐다. 시 서 척독 기 제발(題跋) 묘지명 행장 제문 잡저 명(銘) 만시(輓詩) 뇌문(?文) 시발(詩跋) 등 다양한 형식의 글을 남겼다. 묘소는 금토동에 있으며 1989년에 사당이 건립되고 1991년에 '강정일당 고부상'이 제정되었다. 저서로는 『정일당유고』( 파평윤씨문중 소장)가 있다.
조선조 후기의 문인이며 자는 중무(仲武) 또는 위옥(葦玉)이요 호는 추금(秋琴) 또는 고환자(古?子)요 관향은 진주이다. 곤궁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나 지식이 해박하고 당대의 대시인으로 알려졌으며 여러 곳을 방랑하였다.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 체결에 필담을 맡았으며 64세에 박문국(博文局)을 세워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를 간행하여 국한문 혼용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말 3대 시인으로 일컬어지며 묘소는 복정동에 있다. 저서로는 『동문자모분해』『용학해』『손무자주평』『고환당집』(규장각 소장)등이 있다.
근현대 인물
한말의 의병장이며 호는 동천(東泉)이요 자는 문일(文一)이요 관향은 의령이다. 28세 이전에 주역 고문 병서를 탐독하며 일본에게 항전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당시의 광주군 낙생면을 중심으로 대왕면 돌마면과 용인군에서 수백명의 의병을 소집하여 안성과 죽산 등지에서 왜적과 격전을 벌였다. 뒤이어 광주군 일대의 여러 동지와 함께 이강년 의병대장 휘하에서 참모관이 되어 조령계곡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그 후 고향 인근의 관악산 부근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아 장파열로 순국하였다. 1983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묘소는 하산운동에 있었으나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한말 의병장이며 본명은 재옥(在?)이요 관향은 남원이다. 농업에 종사하고 『효경』과 『논어』를 읽었으며 일제의 한국 강점에 의분을 느끼고 31세에 대왕면 일대의 청년들과 함께 과천면 낙생면 언주면과 연계하여 청년의병 70여 명을 인솔하여 일본의 헌병과 경찰에 대항하였다. 32세에는 허위 이강년과 합세하여 서울로 진격하다가 미아리고개 전투에서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징역 15년형으로 감형되었다가 일본의 이른 바 황태자탄생을 경축하는 특별사면으로 1923년에 석방되어 광복을 맞이하였다. 198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묘소는 금토동에 있다.
한말의 독립운동가이며 자는 성의(聖儀)요 호는 송헌(松軒)이요 관향은 청주이다. 율동 향리에서 한학을 수업하던 중 일본의 한국강점에 통분하였으며 고종황제의 인산을 계기로 만세운동에 가담하기 위하여 서울을 다녀 와 율동과 인근의 주민들에게 만세운동의 정당성을 주지시키고 1919년 3월 26일 밤에는 율동주민 50여 명을 모아 마을 뒷산에 봉화를 올리고, 27일(고향 인근의 분당리 장날)에는 돌마면 낙생면 오포면 주민들과 분당리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하다가 일본 헌병대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고 특별감형으로 출옥하였다. 그 후 신간회(新幹會)광주지회를 결성하여 물산장려 운동과 농민운동을 전개하여 민족혼을 일깨웠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묘소는 율동에 있다.
한말 독립운동가이며 호는 제암(霽菴)이요 관향은 청주이다. 한학을 공부하여 특히 4서 3경에 통달하였으며 일본의 한국 강점에 통분하여 1919년 독립만세운동의 주도자로 참여하였고 천도교 광주교구장으로서 이천 여주 원주 음성 등지와 연락하여 만세운동자금 모금에 협력하였다. 신간회 광주지회장으로서 일본제국주의의 멸망을 기원하는 특별기도회를 추진하고 53세에 기도회사건으로 일본 관헌에게 구속되어 고초를 당하였다. 묘소는 율동에 있으며 199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광주군 대왕면에서 출생하여 24세에 충북 제천군의 지방관리 주사직을 역임하고 유인석의병장 휘하에서 소모장으로 활동하던 중 단양군 영춘면장을 참살하였다. 그 후 수차에 걸쳐 의병전쟁에 참전하고 고향 인근의 서울(경성)로 가서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중국(만주)으로 망명하여 독립군 제3지대에 소속되어 1920년 2월 삼도구(三道溝)에서 카와노(河野)순사부장 등을 사살하였다. 그 후 12월 25일(음력) 평북 제3부 일본경찰대와 교전하다가 전사하였다. 묘소는 궁내동에 있으며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평안남도 평양 설암리에서 출생하여 숭실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1936년에는 안익태의 영향을 받아 일본동양음악학교(첼로전공)를 졸업하고, 중앙고등보통학교음악교사, 덕성여대?숙명여대?한양대 강사와 서울중앙방송국의 음악계장 및 편성과장, 문교부예술위원, 「정의의 소리」방송국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사무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일제의 억압을 피해 평양에서 서울로 거주지를 옮겨 교회찬양대와 혼성합창단(백조합창단)을 조직하여 지휘를 맡았다.
1966년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교향악단 「여성트리닝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여 전국순회연주를 가졌으며 1988년에는 교향악단의 명칭을「서울아카데미앙상블」로 바꾸고 상임지휘자가 되어 60여회의 정기공연을 가졌다. 1950년 한국전쟁 기간에는 「전시동요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1945년 이후로 그가 남긴 작품은 ‘3?1절노래’ ‘태극기’ ‘산바람 강바람’ 등 200여 곡에 이른다.
그는 1980년 초 성남에 정착하여 성남의 예술문화 발전에 공헌하였고, ‘나 성남에 살리라’ (독립운동가 이용상작사)를 작곡하였으며 1989년 KBS동요대상과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음악대상 등을 비롯한 많은 포상을 받았으며 2001년 대한민국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묘소는 성남시 분당구 남서울공동묘지에 있으며 저서로는 『박태현 동요작곡집』제1집, 『어린이 노래책』제2집, 『박태현 동요100곡집』제1집 및 제2집과 가곡집으로 『녹이』(錄耳, 고시조 시가편)가 있다.
박태현은, 매국노 이완용의 저격사건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7년간의 옥고 끝에 출감 후 사망한 형, 박태은의 항일 애국 정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