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한산성<세계유산 지정>

남한산성의 유래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한산성 일대는 일찍이 백제의 옛터였으며 신라의 晝長城(또는 日長城)에서 비롯되었다. 즉 洪敬謨의 [重訂南漢志] (卷1,上篇,城池條)에는 “신라 문무왕 12년에 城을 漢州 동쪽 봉우리에 쌓고, 주장성 또는, 일장성이라고 불렀다. 石築으로 둘레는 4,360步이고, 안에는 여섯 개의 우물과 계곡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또 같은 책 (卷11,下篇,勝蹟條)에 의하면 “일장산성은 신라시대의 주장성으로서 문무왕때에 축성한 것인데 안에는 여섯 개의 우물과 냇가가 있으며,둘레는 8만 6천 8백尺이고 높이가 24尺으로 石築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新羅 文武王 12년(672)에 한주 동쪽에 석축으로 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南漢山은 한산,일장산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百濟 近肖古王 26년(371)에 하남위례성에서 다시 南平壤(당시 京都)으로 移都한 뒤 신라-고려에 걸쳐 거의 천년동안 山城의 연혁을 고찰 할 수 있는 사료가 없었다.그런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주장성 또는 일장산성은 柳馨遠의 [磻溪隨錄]에 의하면 南漢山城으로 호칭하게 되었으며, 조선시대 중엽에는 한산 및 일장산은 南漢山 또는 淸凉山으로 불리워 오늘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남한산성은 古代로부터 天險의 要塞로 인식되어 關防으로서의 중요성이 일찍부터 강조되어 왔던 것이다.
지금의 성은 광해군 13년(1621)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키 시작하였으나 준공치 못하고,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2) 9월에 축성을 시작하여 1626년(인조4) 7월에 완성하였는데,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요충지에 대한 성벽의 보강이 필요하였으므로 1686년(숙종12)의 봉암성 축조, 1719년(숙종45)의 신남성(남격대)축조, 1693년(영조15)의 한봉성 축조 등에 의하여 지금의 남한산성이 이루어졌다.
남한산성의 구성
| 명칭 | 길이(m) | 축조년대 | |
|---|---|---|---|
| 본성 | 동남성 | 7,545 | 인조 |
| 외성 | 봉암성 | 2,120 | 숙종 |
| 한봉성 | 1,093 | ||
| 옹성 | 1남옹성 | 426 | 인조 |
| 2남옹성 | 318 | ||
| 3남옹성 | 125 | ||
| 4남옹성-장경사신지옹성 | 159 | ||
| 5웅성- 연주봉옹성 | 315 | 영조 | |
| 돈대 | 숙종 (신남성축조) |
||
| 1돈대-신남성동돈대 | 134 | 영조 | |
| 2돈대-신남성서돈대 | 121 | ||
지정문화재
1950년대에 남한산성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제2공화국때 남한산성 국립공원 지정이 무효화 되었다. 그후 1963년 1월 21일 사적 57호로 지정되었다.
남한산성의 5개 장대중 서문 남쪽의 청량산 꼭대기에 있는 장대로 현존하는 유일한 장대이다.
조선 인조 16년(1638)에 지은 사당으로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모시고 있다.
이회와 그의 부인 그리고 벽암대사를 모신 사당이다.
병자호란 후 소헌세자, 봉림대군과 함께 청에 인질로 끌려가 끝내 충정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 인조 15년(1638)에 심양에서 순국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 3인을 3학사라 칭하며 이들 3학사를 모신 사당이다.
枕戈亭(침과정) - ‘창을 베게삼는다’ 라는 뜻으로 현지에서는 침괘정이라 통용되므로 지명관례상 침괘정이라 표기한다.
무술을 연마하던 곳으로 연무당이라 불리웠으나, 숙종때 연무관이라 하였고, 정조때 다시 수어영이라 개칭하였다. 이곳에서 군사들의 훈련과 무술 시합을 열어 뛰어난 인재를 뽑아 중앙으로 보냈다고 한다.
현종 13년에 광주 부윤 이세화가 창건하였으며 건물을 중심으로 3개의 연못이 있었으나 현재는 2개만 남아있다. 당시에는 고관들이 낚시하며 즐기던 곳이었다.
행궁(行宮)이란 임시 숙소, 또는 전쟁시에 임시 피난처나 지휘소로 왕이 머물기 위해 궁의 격을 갖추어 지은 건물을 말한다.
남한산성내에 있던 9개의 사찰중 하나이며,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해 건립한 군막 사찰이다.
망월사는 남한산성내에 있는 9개의 사찰 중 가장 먼저 지어진 사찰로,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한양의 장의사(壯義寺)를 허물고 불상, 금자화엄경, 금정 1구를 이곳으로 옮겨와 지었다고 한다.
전국 8도의 승병을 성내 여러 사찰에 주둔케 하였는데, 개원사는 그 중 승병의 총 지휘소로 사용되었던 사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