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내동 가옥 外

본 가옥은 분당구 수내동 84번지에 위치한 대지 200평 가량되는 한산이씨의 종가집 가옥이다. 이 일대는 총 70여 호가 모여 살았으며, 그 중 한산이씨는 30여 호 가량되는 집성촌이었다. 대부분의 가옥은 6.25 사변으로 전소되거나 파괴되어 후에 다시 복구하였으나 그 원형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상태였고. 다행히 이 가옥을 포함한 3,4여 호 만이 피해를 면하였으나 후대에 많은 보수가 이루어져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집은 이 가옥뿐이다.
한산 이씨의 살림집 가운데 하나로 사용된 목재나 지은 수법으로 보아 19세기 말 건물로 추정한다.
바깥마당에 면한 一자형 문간채 뒤에 ㄱ자형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안채 뒤로는 널찍한 뒷마당이 흙담에 둘러싸여 있다.
안채는 10칸 규모의 초가로 1칸 반 건넌방과 4칸 대청, 2칸 안방을 일렬로 배열하였고, 안방 앞에서 꺾여 부엌과 광이 있다. 안방과 건넌방에는 반침이 설치되어 공간의 효용도가 높다.
문간채는 6칸 규모를 가진 초가인데 가운데에 대문이 있고, 오른 쪽에 온돌방이 있다.
현재, 신 도시 중앙공원 안에 자리잡고 있어 주변에 밀집한 아파트군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집 주위에는 마을 어귀에 있던 큰 느티나무와 연못, 정자터 등이 있다.
조선 후기에 지은 집으로 경기지방 살림집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청주한씨 문정공파 묘역 신도비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가까이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문정공 한계희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한계희(1423~1482)는 세종 23년(1441) 진사가 되고, 세종 29년(1447)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특히 세조의 신임을 두터이 받았으며, 예종과 성종 때에는 두차례에 걸쳐 공신이 되어 그 벼슬이 우찬성에까지 올랐다. 조선 전기의 명문가였던 집안배경이 그가 벼슬길에 오르게 되는 큰 힘이 된 것은 사실이나, 그가 지닌 학식과 곧은 성품 역시 그 바탕이 되었고, 주위로 부터도 많은 존경을 받았다. 죽은 후에는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선생의 묘 아래쪽에 자리한 비는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조선 전기 당시의 위패 형식을 하고 있다. 받침돌은 윗면에 높직한 연꽃무늬를 둘러 새겼으며, 머릿돌은 연꽃이 엎어져 있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고,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돌이 솟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연산군 6년(1500) 즈음에 세운 것으로 추측되며, 그의 친구였던 서거정이 지은 글에, 안침의 글씨로 하여 비문을 새겨 두었다.
한계희(1423~1482)는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문정이며 우승지, 좌승지, 공조참판, 이조참판, 이조판서, 좌찬성을 역임하였고 기내훈구파에 속하는 유학자로서 특히 세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최항 등과 함께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했고 1447년(성종 8) 의방유취의 간행을 주관하였다.
신도비는 개석이 조선초기의 전형적인 양식이었던 화관석, 비신, 기대로 이루어졌고 화관석과 비신이 하나의 화강편마암으로 화강암인 기대에 꽂아 세우게 되어 있다.
규모는 화관석이 폭72㎝, 두께23㎝, 높이52㎝이고 비신이 61×18×152㎝ 기대가 115×59×44㎝이며, 총고 48㎝이다.
신도비문은 서거정(1420~1488)이 찬하고 안침이 전과 글씨를 썼다. 건립년대는 1483년(성종 14)이다.
한사문(1446~1507)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공간이며 대사헌, 병조참판, 공조참판, 공조판서,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중종반정에 공을 세웠으며 신도비는 총고 231㎝의 규모로 기대의 하부 앞. 뒷면에는 각 4개와 2개의 구획을 나누어 그 안에 안상문이 조각되어 있고 상부에는 연당초문이 조각되어 있다. 1508년(중종 3)에 세웠으며 신용개(1463~1519)가 찬 하였고 신흠(1566~1628)이 전과 글씨를 썼다.
한사개(1453~1521)는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영흥이며 영흥부사와 해주, 광주, 진주 등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신도비 총고는 206.5㎝이고 관석의 전면에는 운문과 상단 중앙부에 초승달이 조각되어 있는데 신도비에 해와 달이 조각된 경우는 드물다. 김안로가 찬 하였으며 1521년(중종 16)에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