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정일당 묘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1호)

1772년(영조 48) - 1832년(순조 32), 조선후기의 여류문인, 본관은 진주, 호는 정일당, 제천출신, 아버지는 재수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서응의 딸이다. 윤광연의 부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20세에 출가한 뒤 집이 가난하여 바느질로 생계를 이으면서도 남편을 도와 함께 공부하였다.
경서에 두루 통하였으며 시문에 뛰어나 당시에 문명이 높았다. 시는 대개 학문 또는 수신에 관한 내용이 많다. 또 글씨에 능하여 홍의영, 권복인, 황운조등의 필법을 이어 받았으며, 특히 해서를 잘 썼다.
사람들이 그의 남편에게 글을 청하면 대신 지어주는 일이 많았다.
이직보가 그의 시 한수를 보고 매우 칭찬하였는데 이 소문을 듣고 저술을 일체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저서로는 [정일당유고] 1책이 있고 또한 시문집 1책, 신연활자본, 1836(헌종 2)에 간행된 초간본과 1926년에 간행된 중간본이 있다. 규장각도서관에는 필사본이 있으나 간행본과 편차가 틀려 대본을 알 수 없다.
권두에 윤제홍의 초간서문과 김창석의 중간서문이 있고 말권에 송치규, 윤수경의 초간발문과 김석곤의 중간발문이 있다.
시 38수, 명 5편, 서 10편, 기 3편, 설 1편, 제발 2편, 묘지명, 행장, 제문 각3편, 잡저 1편, 부록으로 행장, 묘지명, 제문, 뇌문, 만장, 이시발, 필첩발, 추만소발, 전, 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시는 대개 학문 또는 수신에 관한 것이 많다. [원운] 은 늙어가는 자신을 생각하며 인생의 원리를 읊은 것이며 [제석감음]에서도 51세가 되는 감회와 마음을 닦으며 남은 여생을 보내겠다는 신념을 말하고 있다. [성경음]에서는 수신의 도리를 표현하였고, [청추선]에서는 초가을 매미소리를 들으며 심란한 여심을 읊고있다.
시의 대부분이 문사의 수식보다는 고상한 심사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서는 남편과 주고받는 서찰이 대부분이며 그밖에 남편을 위한 대작으로 송치규에게 보낸 별지가 있다.
별지에서는 심의, 제주, 초반 등에 관한 예설을 묻고있다. 잡서[사기록]은 11대 시할아버지로부터 시아버지까지 좋아하였던 음식을 적은 것들이다.
특히 정일당은 시어머니 지일당 전씨와 시로써 대화를 주고 받은 일화로도 유명하며 저서에 '정일당 유고'가 전해온다. 분묘는 남편 윤광연과 합장되어 있는데 묘비 하나없이 전해오던 것을 성남시에서 1986년 향토문화재 제1호로 지정하고, 2000년 2월 파평윤씨 문중의 협조를 받아 사당과 묘지를 재조성한 것으로 정일당의 지극한 효성과 높은 뜻을 기리고 있다.
송산 조 견선생 묘(성남시 향토문화재 제3호)

송산 조 견선생(1351~1425)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양이고 초휘는 윤이고 자는 거경이며 호는 송산, 시호는 평간공이다.
조선왕조가 개국하자 선생은 통곡하며 두류산(현 지리산)으로 들어가 이름을 견으로 자를 종견이라 바꾸었고, 조선조 태조가 선생의 절개를 찬양하고 재주를 아껴서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청계산으로 은거하여 망경대에 올라 고려 송도를 바라보고 통곡하며 생을 마감한 인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벼슬은 고려조에는 지신사와 안렴사에 이르렀고 조선조에는 벼슬이 상장군 개국공신, 지중추원사, 평성부원군들을 제수 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다만 조선초기에 관직을 제수한 기록과 조선중기에는 고려조의 충신으로 인정받은 기록이 있어 행적에 대한 이견이 있으나, 본 묘역은 여말선초의 사대부 묘제를 가지고 있고 석물(묘표, 문인석, 석등 등)이 600년 된 묘역으로 고려말 조선초기의 묘제를 알 수 있는 유적이다.
특히 묘역주변에는 선생의 자손묘가 소재하는데 묘 형태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묘 형태를 한곳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선생은 양주 수락산 기슭의 한 마을( 현 의정부 송산마을)에서 75세에 생을 마감하였고, 후세에 선생의 호를 따서 송산이라 부르고 살던 터에 유허비를 세우고 지역사람들이 송산사(경기도문화재 제42호)를 중건하고, 양주에도 정절사(사천서원)을 세워 남을진, 조견 두분을 모시고 사림들이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고 , 공주에도 선생의 신주를 모신 송산사우(공주시 향토문화재 제8호)가 있다.
금릉 남공철 묘역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4호)

남공철(1760~1840)선생은 조선후기의 문장가?정치가이며, 본관은 의령(충경공파)이다. 字 원평(元平)이고, 호 금릉(金陵). 사영(思潁)이며, 시호 문헌(文憲)이다. 아버지는 대제학 有容으로 그는 일생동안 독서를 즐겨 經典의 뜻에 통달하고, 고문에 해박하여 구양수의 문장을 순정(純正)한 법도라 하여 가장 존중하면서 시.서예에 뛰어났고, 금석문.비갈을 남긴 당대의 제일가는 문장가로 전사자체(典史字體)의 서체를 창안한 이로 널리 알려져 있다. 1784년 세마에 보임된 후 현감-병조정랑-홍문관 부교리-승정원우부승지-형조참의-대사성-관찰사-홍문관부제학-도승지-(공로 승급 : 가선대부-자헌대부-가의대부-정헌대부-숭정대부-보국 숭록대부)규장각제학-예문관제학-도총관-병판서-좌의정을 거쳐 1817년 우의정에 임명된 뒤 14년 동안 재상을 역임한 후 50여 년 동안 관직에 있으며 강직.청렴한 3정승으로서 영의정이 된 후(1833) 봉조하(奉朝賀)가 되기도 했다.
저서로 순조.익종의 <열성어제列聖御製>편수 외 <고려명신전>,<귀은당집>,<금릉집>,<영옹속고>,<영은문집>등 방대한 저술이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고 있다. 한편, 성남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에서는 금릉 남공철 학술연구를 개최한 후 뒤이어 문화재 지정 건의를 관계시 당국에 제출하였었다.
그의 묘역은 수정구 금토동 산66(청계산 능안골)에 있으며, 봉분과 용미와 활개, 문인석.신도비를 갖추지 않은 채상석.향로석.망주석.옥개석.비갈만 단촐하게 있으나 옛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여 조선후기 사대부들의 墓制 연구에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특히, 비신의 碑文을 자신이 생전에 찬술하여 당나라 안진경(顔眞卿) 글자로 집자하여 금석학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금릉 묘역위에 자리잡은 그의 모친(정경부인, 안동김씨)묘와 함께 지정.보호하여 총 면적 169평방미터 구역을 성남시향토문화재 제4호로 지정(2002.11)하였다.
금릉은 순조에 여러차례 사직을 권하니 "공이 조정에서 40여 년 동안 보여온 충성스러움과 근면함과 단정함과 성실함은 일찍부터 흠탄해 온 바였는데, 지금 진언한 여러 조복은 조정으로 나올 때나 집으로 물러갈 때나 항상, 잊지 않고 지성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아끼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마땅히 명심하겠소."하며 여러 관원들이 성대한 전별식을 베풀었다고 한다.
경헌 조몽정 묘역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5호)

경헌 조몽정(1535∼1593)선생은 효자로 본관은 창녕, 자는 응길, 호는 경헌으로 첨지중추부사 등의 증손, 강원도관찰사 한필의 손, 호조좌랑을 지낸 언박의 자이다.
11세 어린 나이에 부친상을 당했으나 어른들처럼 묘 아래에 제실을 짓고 수묘의 정성을 다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에 사당의 신위를 받들고 피난하였는데 난 중이라도 어머니를 위하여 계절에 맞는 음식과 의복을 준비해 드릴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향시에 응시하여 여러차례 추천되었으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관직에 나가지 않는다는 지조를 지켜 벼슬하지 않았다.
묘역은 분당구 서현동 산 32번지에 있으며 오랜 세월동안 봉분이 깎이고 석물과 비석 등이 마모 및 파손되어 보존상태가 좋지 못하나 옛 형태를 대체로 간직하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연성군 이 곤 금석문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6호)

연안이씨(延安李氏)로 시조(始祖) 휘(諱) 무(茂) 이후 후손 첨사공파(詹事公派)의 제11세손이며, 조선중기의 문신(文臣)으로서 자(字) 자정(子靜), 호(號) 녹창(鹿窓)이다. 증이조참의(贈吏曹參議)며 연안군(延安君)인 아버지 휘(諱) 인문(仁文)의 4남으로 출생(1462)하여 생원시 및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92)후 병조좌랑-사간원헌납-성균관사예-사헌부장령-장악원첨정-황주, 해주목사-밀양부사 등 내외직을 두루거쳐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에 참여하여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錄勳)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한때, 첨지중추부사로 관압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예조참의-장례원판결사가 되었으나 갑자?기묘사화에 연류되어 반대파 무고(誣告)로 탄핵?삭훈되기도 하였다. 이후 철원부사-여주목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 오위장(五衛將)으로 창경궁 직소(1524) 중 향년 63세에 별세했다. 중종(中宗)은 묘조(廟朝) 사신으로 하여금 예장(禮葬)을 치제(致祭)케 하고, 자헌대부예조판서겸지경연춘추관의금부사 증직(贈職) 후 '연성군(延城君)' 봉호(封號)와 함께 광주군 판교동 서편의 '연안군(延安君)' 묘소 선영(先塋) 주산(主山)에 모시고, 마을안에 별묘(別廟)를 세워 향묘(享墓)토록 예우를 받았다.
배(配) 정부인(貞夫人) 문화류씨(文化柳氏)와 합장되었으며, 4남1녀를 두어 장남 대승(大升)은 판관-군수로 증직 통례원좌통례 통훈대부인 재령공(載寧公)과 차남 공승(公升)은 장례원사평으로 증직 승정원좌승지인 사평공(司評公)이며, 3남 복승(復升)과 4남 만승(萬升) 외 딸이 있었다. 장남 직손(直孫)에 탁(倬)과 숙(?) 외 그후 종손(宗孫)은 요신(堯臣)-창(暢)-여혼(汝渾)-자형(自馨)-양(?)-도창(道昌)-군평(君平) 등으로 어느덧 30세손이 번창하였으며, 차남 직손은 간(侃)과 언(偃) 외 그후 종손이 대로(大老)-승세(承說)-여후(汝後)-진형(震馨)-성인(聖麟)-유한(維漢)-정간(挺幹) 등 5세기에 무려 8,300여 후손들이 번창하여 각 분야에서 활약함을 알 수 있다.
구비(舊碑)에서 "공은 총명하고 명민하여 학문에 힘쓰니 서당에서 글배울 때 항상, 장원을 차지했다. 직무에도 뛰어난 식견으로 불의를 규탄하는데 흔들림없이 기민하게 처리했고, 외직에 있을 때 마음이 너그럽고 까다롭지 않으면서 밝고 엄하게 하니 '엄숙단정하고 굳세어 그 풍채가 으뜸'이었다"고 기록으로 전한다.
묘역의 원형 봉분은 용미와 활개를 갖춘 높이 200센티, 둘레 560센티로서 상석?향로석?장명등과 좌우 신구(新舊) 묘표(墓表) 및 문인석이 있고 특히, 옥개석 통비 관석(官石)에 조식(彫飾)된 '삼족오(三足烏)'는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6호 문화재로 평가되어 지정(2004) 받은 만큼 우리나라 민족정신의 상징성 있는 문화유산이다.
광주이씨 묘역(성남시 향토문화재 제7호)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 7호인 하대원동 광주이씨 묘역은 둔촌(遁村)선생 이집(李集) 후손들의 묘역으로 인물들의 사적(史蹟)과 함께 조선전기 묘역으로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성남시의 향토문화재이다.
하대원동 산3-1번지에는 둔촌의 아들로 포은(圃隱 정몽주)선생 문하에서 수학(修學)하고 보문각 직제학, 형조우참의 등을 역임했으며 벼슬에서 물러난 후 광주(廣州)의 탄천가에 은둔했기 때문에 ‘탄천선생’이라 불린 이지직(李之直, 1354~1419)과 부인 경주이씨, 둔촌의 증손으로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광원군(廣原君) 이극돈(李克墩, 1435~1503)과 그의 아들 감사공(監司公) 이세정(李世貞, 1461 ~ 1529)의 묘소가 있다.
하대원동 산7-1번지 외 묘역에는 둔촌선생의 손자 사인공(舍人公) 이장손(李長孫, 1390~1429), 증손 참의공(參議公) 이극규(李克圭, ?~?), 6대손이며 임진왜란 때 관서부원수(關西副元帥)로서 왜군과 싸운 장렬공(壯裂公) 이윤덕(李潤德, 1529~1611), 8대손으로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냈고 정묘호란 때 안주성(安州城)에서 전사하여 안주(安州) 충렬사(忠烈祠)에 배향 산18번지에는 둔촌의 막내 손자로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이예손(李禮孫, ?~1459)과 산33-3번지에 그의 아들 참판공 이극기(李克基, 1426~1491)의 묘소가 있다.
신종군 이효백 묘역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8호)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8호인 분당구 석운동에 위치한 이효백(1422~1487)의 묘역은 조선전기 묘역으로써 역사적 가치를 지닌 성남시의 향토문화재이다.
신종군(新宗君) 이효백(李孝伯)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희삼(希參)으로 조선조 제2대 정종대왕의 제10왕자 덕천군 후생의 장남으로서 궁술(弓術)이 비상하여 ‘태조의 신궁’ 이라고 불린 무인으로 궁술에 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번 나와 있으며, 묘역 또한 활과 관련 있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묘역은 묘표, 상석, 문인석 한 쌍 등의 석물을 갖추고 있으며 묘표는 전후 2면에 있고, 앞면의 비문은 마모가 심하다. 건립연도는 1504(연산군 10)년이다.
청주한씨 청연공파 묘역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9호)

성남시 분당구 율동은 문정공 한계희(韓繼禧 1423~1482)가 묻힌 이후로 청주한씨가 400여년 이상 세거하여 오고 있는 곳이다.
율동 산 9-1에 위치한 성남시 향토문화재 청주한씨 청연공파(靑蓮公派)묘역은 당대 유림들로부터 최고의 문사로서 추앙받고 호당(湖堂)에 뽑힌 청연공 한지원(韓智源, 1514~1561)을 필두로 그의 아들 한 술(韓述 1541~1616)과 한 회(韓懷, 1550~1621), 그의 손자 한명욱(1567~1652), 증손 한 전(韓甸, 1609~1691), 5대손 한 숙(韓肅, 1691~1708) 등을 포함한 6대에 걸친 묘역으로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조성되었다.
묘들은 부분적인 차이는 있으나 조선시대 전형적인 묘제 양식을 보여주고 특히, 문인석의 모습들이 조성 시기별로 다양하게 확인되고 있으며, 묘비들의 경우,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독특한 서체로 쓰여 있어 사료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를 함께 지닌 문화유적이다.
덕수이씨 의정공파 묘역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10호)

덕수이씨는 경기도 개풍을 본관으로 한 종중으로서 율곡 이이와 충무공 이순신을 배출한 조선시대 명문가이다.
덕수이씨가 성남시에 정착하게 된 것은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인 해풍군(海豊君) 이함이 성남의 고등동 사패지에 부친 풍성군(豊城君) 이의번(李宜蕃)의 묘를 쓰고 세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이함의 증손자 의정공 이경민 대부터 가문의 번영을 이루어 500년 세거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의정공파 묘역에는 이경민의 할머니 진주 정씨, 아버지 이통, 형 이경안, 계배 성주 이씨, 아들 이래까지 4대로 이어지는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각 묘역에는 17세기 석물 양식인 묘비,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동자석 등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어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판교 백제·고구려 고분군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11호)

판교 삼국시대 횡혈식 석실분 11기는 분당구 판교동과 삼평동 지역에서 각각 발굴되었다. 조성 시기는 4세기 후반∼5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판교동에서 발견된 9기의 한성백제 석실분은 입구인 연도가 우측에 붙은 점, 동장수법으로 벽석을 올린 것, 변형궁륭형 천장 등이 공통적인 특징으로 한성백제기의 묘제 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삼평동에서 발굴된 2기의 고구려 석실분은 축조방식이 고구려의 전통적인 모줄임천장 양식과 쌍실분으로 구안되었다. 특히 1호분의 천장의 구조는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 고구려 고분군과 비슷하며, 2호분에서 보이는 좌편재 관대는 화성시 동탄면 청계면 고구려 석실분과 상통한다.
이들 유적들을 통해 백제 근초고왕 전후시기의 활발했던 동북아시아 대외 교류의 흔적 및 이후 고구려의 남하로 백제의 웅진(공주)천도로 이어지는 한성백제의 흥망의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이다.
판교 통일신라~고려 고분군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12호)

판교 통일신라~고려 고분군은 백현동, 삼평동, 사송동 일원에서 발굴되어 낙생대공원으로 이전 복원된 석곽묘(石槨墓), 석실묘(石槨墓), 토광묘(土壙墓)로 구성되어 있다.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 앞트기식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墓),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 등 다양한 무덤 형태를 보인다.
이중 백현동 고려시대 토광묘는 크게 중앙의 토광묘와 이를 둘러싼 방형 담장(曲墻)시설, 담장 동쪽의 석렬 유구로 형성되어 있는데 경기도에서는 매우 드문 사례에 해당한다.
또한 삼평동과 사송동의 석실묘 등 통일신라기 유적군은 중원구 도촌동과 여수동, 광주 남한산성의 신라 유적들과 연계하여 유추해본다면 삼국통일시기 한반도 내 성남지역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성남지역의 중세 고분 문화를 보여준다는 데 의의가 있다.
판교 생활유적군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13호)

판교근린공원 내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13호는 백제 집터와 부뚜막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조선시대의 각종 가마와 건물지 등이 판교공원 내로 이전 복원한 것이다.
부뚜막은 삼평동 백제 집터에서 발견되었다. 백제문화가 서울 잠실에서 탄천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는 경로를 밝히는 동시에 당시 성남의 주거 및 식생활을 보여주는 근거 자료로서 의미를 지닌다. 통일신라~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송동 숯가마는 도촌동 숯가마와 함께 과거 성남지역 사람들의 경제활동을 보여주는 주요 유적이다.
운중동 기와가마의 조성 시기는 조선시대로 비정되며, 벽체 구조 분석 결과 단기간 사용되었으며 한 가마에서 생산 가능한 기와 수를 1,000여 장 가량으로 산출할 경우 대형 건물의 보수를 목적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송동 도기가마는 벽체 구조의 분석을 통해 장기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소성실 바닥은 출토된 대부분의 유물은 성남지역의 도기(陶器) 생산기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판교동 담장 건물지는 고려 중기에 조성된 제사 관련 장소로서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비는 당집으로 추측된다.
부뚜막과 담장건물지를 통해 당시 판교지역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으며 각종 가마들과 관련 출토유물을 통해 성남지역의 경제활동 및 생산기술에 관한 이해 단서를 제시하는 성남 생활사의 주요한 유적군이다.
평양조씨 석실공 조철산 묘역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14호)

평양조씨 석실공 조철산(1404-1465) 묘역은 조선 초기의 사대부 묘역으로 묘비, 문인석, 장명등 등이 조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석실공 묘비는 1468(세조14, 성화4)년에 건립되었고, 정경부인 이씨의 묘비는 1474(성종5, 성화10)년에 세워져 성남지역의 묘비 중 건립년도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조철산 묘역은 시대성, 희귀성, 예술성, 보존상태 등의 측면에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2016년 2월 17일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조철산의 본관은 평양, 호는 석실(石室)이다. 고려시대 원나라와의 외교에 공을 세운 정숙공 조인규(貞肅公 趙仁規, 1237-1308)의 현손이며, 조덕유(趙德裕 1314-1352)의 손자이고, 고려 말 충신으로 성남시향토문화재 제3호인 송산 조견(松山 趙? 1351-1425)의 둘째 아들이다.
석실공은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대 변혁기에 첨지중추원사 등 수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부친의 유훈에 따라 공(公)과 두 아들 인(?)과 식(軾)이 끝내 출사하지 아니하여 삼대(三代)에 걸쳐 불사이군(不事二君) 충절의 역사인물이 배출되어 삼세삼충(三世三忠)이라 일컬어졌다. 사후에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에 추증되었다.